영안왕의 손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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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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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왕 행장에는 기자오의 아들은 다섯이고 손자는 11명이고 손녀는 7명이라 했으나 손자는 벼슬했거나 손녀는 시지간 것을 기준으로 그 이름을 기록하고 나머지 아직 벼슬하지 못한 손자와 아직 어려서 결혼하지 않은 손녀는 기록이 없다. 그 손자손녀들도 기자오의 아들들 5명가운데 누구의 아들과 딸인지 기록하지 않고 손자들 손녀들 이렇게 죽 늘어 놓았다. 이 손자와 손녀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료를 찾아 연결을 해본다. 그 손자들 기록은 다음과 같다.
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
다시 정리하면 손자들은
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
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
次天驥
有傑
田龍。
손녀는 정리하면
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
이 된다.
씨족원류에는 영안왕의 다섯 아들 가운데 큰아들 軾은 영안왕 보다 먼저 죽었고 자녀는 없다. 둘째 轍의 아들로는 仁傑, 有傑, 世傑, 賽因帖木兒, 賽人不花이고 딸로는 王重貴의 처妻가 나오고 傑과 몽골이름엔 賽를 돌림으로 쓰고 있다. 셋째 轅의 아들로는 完者不花가 있고 딸들로는 洪寶環의 처妻, 李壽林의 처妻, 奉文의 처妻가 나온다. 넷째 輈의 아들로는 武龍이 우리 족보에 나오고 씨족원류엔 딸만 白璘의 처妻가 나온다. 다섯째 輪의 아들로는 田龍이 나온다.
이 가운데 손자들 仁傑과 有傑은 傑자돌림으로 둘째 轍의 아들이고 田龍은 다섯째 輪의 아들로 밝혀진다. 손녀인 洪寶環의 처妻는 셋째 轅의 딸이다. 문제는 손자들인 天麟, 天驥이다. 天麟, 天驥은 같은 天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아서 4촌은 아니고 형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天麟의 몽골 이름이 完澤普化이다. 轍의 아들들 가운데 몽골이름으로는 맨앞에 賽를 쓰는 것으로 보아서는 天驥의 몽골이름에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다(元遣轅子完者不花, 改冊榮安王爲敬王, 又追封三代爲王)]는 기록이 있다.
轅의 아들이 完者不花라면 完澤普化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轅의 아들로 추정이 된다. 完者不花는 天驥이고 天麟과 天驥는 모두 셋째 轅의 아들로 보인다.
영안왕 행장
公諱子敖字子敖。幸州人。始以門功拜散員。至元庚寅。叛王乃顔之黨哈丹。與其衆。東走眞番。闌人我疆。逆氣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安平公主。率百官入江華島。避其鋒。州郡皆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時爲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揔部散郞。出守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遊。務盡其歡。不理家人事産。年六十三。以天曆戊辰。卒于家。夫人三韓國大夫人李氏。左僕射諱湊之孫。國學祭酒諱行儉之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三女。今皇后其季也。謹按奇氏。自國初以武材稱。世著其勞。及仁王妣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諱濡之孫。判事諱景恂之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冢宰相毅,明,神。當毅王末年。武人鄭仲夫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顓擅。雖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甞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飮恨以卒。時人惜之。三司始諱璋。後避國諱更焉。初以將軍出爲忠州牧。專尙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感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者。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眞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群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眞以平章。從忠烈王入覲。寵遇異常。文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甚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歆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于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於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軾。先公歿。次輒。以僉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僉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議令廉敦紹。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揔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溥化。以軍簿揔郞。宿衛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目。今掇其大槩爲行狀。以備采擇焉。至正▣▣八月初一日。謹狀。
공(公)의 이름은 자오(子敖)이고, 자(字)도 자오(子敖)이다.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가문의 공훈으로 산원(散員) 벼슬을 받았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년, 충렬왕 16년)에 반역을 일으킨 원나라 왕족 나얀(乃顔)의 잔당 하단(哈丹)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 진번(眞番)으로 달아나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사납고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충렬왕은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그 날카로운 기세를 피했다. 각 주와 군에서는 모두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면서 성을 지키니, 나라 안팎이 몹시 소란스럽고 두려움에 떨었다. 공은 당시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 되어 대장기를 짊어지고 선봉에 서서 제법 큰 공을 세웠다.
도적들이 평정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산랑(揔部散郞)이 되었고, 나가서 선주(宣州)를 지켰는데, 다스림이 직분에 알맞아 백성들이 떠나간 그를 그리워했다.
공은 스스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奕世衣冠) 출신이면서도 벼슬이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성품 또한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권세가에 빌붙어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더불어 노닐며 온전히 그 즐거움을 다하려 힘썼고, 집안의 재산 관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63세가 되던 천력(天曆) 무진년(1328년, 충숙왕 15년)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주(李湊)의 손녀이자 국학제주(國學祭酒)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의 딸이다. 가문이 번창하고 덕이 무거워 군자(기자오)의 배필이 될 만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기황후)가 바로 그 막내딸이다.
삼가 살피건대, 기씨(奇氏) 가문은 고려 초부터 무예의 재능으로 칭송받아 대대로 그 공로를 드러냈다. 고려 인종의 비(妃)인 임씨(任氏)가 의종, 명종, 신종 세 임금을 낳아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 일컬어졌는데, 공의 할머니가 실은 태후의 동생인 평장사 임유(任濡)의 손녀이자 판사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는 더욱 번창하고 귀해져 동방(고려)에서 으뜸가는 갑족이 되었다.
시중(侍中)을 지낸 강정공(康靖公)은 총재(冢宰, 총리)로서 의종, 명종, 신종을 보필했다. 의종 말년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조정 신하들을 몰살하고 왕을 마음대로 폐하고 세웠다. 이때부터 권신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잡고 선비들이 두려워 발을 포개고 섰으나, (강정공은) 도리로서 침착하게 대처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왕실을 붙들어 옛 국가의 체제를 잃지 않게 하니, 시중(강정공)의 힘이 가장 컸다.
복야(僕射, 기자오의 조부 기윤숙)는 강개하고 절개와 의리를 지켰다. 나라의 운명이 간고하고 난처할 때에 진양공 최이(崔怡, 최우)가 권력을 독점했다. 비록 권신(최우)과 혼인으로 얽혀 있었으나 결코 아첨하지 않았으며, 매번 거역과 순종, 화와 복의 이치를 깨우쳐 주어 간사한 짓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최이가 병이 들자 그 아들 최항(崔沆)이 어리석고 불초했으나, 많은 사람이 최항에게 아부했다. 그러나 복야만은 홀로 그를 미워했다. 최이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를 물었을 때, 복야는 곧바로 어진 이를 천거하여 대답했다. 최항이 권력을 이어받자 예전의 혐오감 때문에 배척을 당했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삼사사(三司使)를 지낸 (기자오의 아버지)는 처음 이름이 장(璋)이었으나, 후에 국휘(임금의 이름)를 피하여 이름을 고쳤다. 처음에 장군으로서 나아가 충주목사(忠州牧)가 되었는데, 오로지 너그럽고 화평함을 숭상하여 채찍 대신 부들나무로 벌하고 부드럽게 다스리니(蒲鞭薤水), 백성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다. 정치의 성적이 가장 좋아 조정으로 불러 올려져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고, 곧 응양군(鷹揚軍)으로 옮겼다. 나라의 제도에 군사의 정사와 상벌, 장교의 진퇴는 모두 응양군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었는데, 삼사사(기장)는 그 은혜와 위엄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고 매사 예법으로써 행동하니 군사들이 감복했다. 이로 말미암아 재상의 반열(상부)에 급격히 올랐다. 충렬왕은 그를 거물급 가문의 국로(國老)로 여겨 더욱 예우를 더했으니, 그 애도함과 영예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의 어머니는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로, 전법판서 박휘(朴暉)의 딸이며 시중 이장용(李藏用, 문진공)의 외손녀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년)에 "올해에 왕과 공들, 그리고 여러 목축 관리들은 모두 상도(上都)로 모이라"는 원나라 황제의 조서가 내려져, 왕이 역말을 타고 조참하러 가게 되었다. 이장용(문진공)은 평장사로서 충렬왕을 수행하여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는데, 총애를 받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은 중국(원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우승상이었던 동평충헌왕(바얀)이 그를 매우 그릇이 큰 인물로 아껴 특별한 예로 대우했으며, 자리에 앉을 때 반드시 우측 자리를 비워두고 모셨다. 한림원의 왕학사 등 여러 공들도 그의 풍채와 지조를 흠모하여 모두 사사로이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가 (황제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어 대답하고 아뢴 것과, 본국(고려)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한 것들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에 의지하고 있다.
공은 이처럼 안팎이 모두 명문가였다. 고조부인 문하시랑평장사 기수전(奇守全) 이하로 조상들이 장상(將相, 장군과 재상)을 드나들며 백성들에게 공을 베풀었으나, 정작 공은 조상의 덕만을 누리지 못하고 낮은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는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내리려고 후손을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첫째 아들 기식(奇軾)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아들 기철(奇轍)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이며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기원(奇轅)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다.
넷째 아들 기주(奇興)는 대광 원윤(元尹)이다.
다섯째 아들 기윤(奇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첫째 딸은 상의평리 조희충(趙希忠)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전의령 염돈소(廉敦紹)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11명이다.
첫째 손자 천린(天麟)은 어릴 때 이름이 완택푸화(完澤普化, 올제이부카)인데, 판도총랑으로서 황제의 수레(輦轂)를 가까이서 모셨고 지금은 직성사인(直省舍人)이다.
둘째 손자 인걸(仁傑)은 어릴 때 이름이 첩목이부화(帖睦邇溥化, 테무르부카)인데, 군부총랑으로서 궐정을 숙위(경호)하고 있다.
다음 손자인 천기(天驥), 유걸(有傑),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다.
나머지는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손녀는 7명이다.
첫째 손녀는 홍복도감판관 홍보환(洪寶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가세(家世)와 공덕은 국사에 실려 있고, 공의 업적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명백히 남아 있다. 이제 그 대략적인 개요를 모아 행장(行狀)을 지어 채택에 대비하고자 한다.
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
다시 정리하면 손자들은
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摠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
次仁傑。小字帖睦邇漙化。以軍簿摠郞宿衞闕庭。
次天驥
有傑
田龍。
손녀는 정리하면
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
이 된다.
씨족원류에는 영안왕의 다섯 아들 가운데 큰아들 軾은 영안왕 보다 먼저 죽었고 자녀는 없다. 둘째 轍의 아들로는 仁傑, 有傑, 世傑, 賽因帖木兒, 賽人不花이고 딸로는 王重貴의 처妻가 나오고 傑과 몽골이름엔 賽를 돌림으로 쓰고 있다. 셋째 轅의 아들로는 完者不花가 있고 딸들로는 洪寶環의 처妻, 李壽林의 처妻, 奉文의 처妻가 나온다. 넷째 輈의 아들로는 武龍이 우리 족보에 나오고 씨족원류엔 딸만 白璘의 처妻가 나온다. 다섯째 輪의 아들로는 田龍이 나온다.
이 가운데 손자들 仁傑과 有傑은 傑자돌림으로 둘째 轍의 아들이고 田龍은 다섯째 輪의 아들로 밝혀진다. 손녀인 洪寶環의 처妻는 셋째 轅의 딸이다. 문제는 손자들인 天麟, 天驥이다. 天麟, 天驥은 같은 天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아서 4촌은 아니고 형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天麟의 몽골 이름이 完澤普化이다. 轍의 아들들 가운데 몽골이름으로는 맨앞에 賽를 쓰는 것으로 보아서는 天驥의 몽골이름에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원나라에서 기원奇轅의 아들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기울제이부카)를 보내 영안왕榮安王을 경왕敬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또 3대를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았다(元遣轅子完者不花, 改冊榮安王爲敬王, 又追封三代爲王)]는 기록이 있다.
轅의 아들이 完者不花라면 完澤普化도 完을 돌림으로 쓰는 轅의 아들로 추정이 된다. 完者不花는 天驥이고 天麟과 天驥는 모두 셋째 轅의 아들로 보인다.
영안왕 행장
公諱子敖字子敖。幸州人。始以門功拜散員。至元庚寅。叛王乃顔之黨哈丹。與其衆。東走眞番。闌人我疆。逆氣張甚。所至殺掠。忠烈王偕帝女安平公主。率百官入江華島。避其鋒。州郡皆據險。且戰且守。中外洶洶。公時爲中軍偏將。負纛前驅。頗有功。賊平。累遷揔部散郞。出守宣州。所居稱職而有去思。自以奕世衣冠。仕不甚達。性又寬厚。且不喜干謁。日與賢士大夫遊。務盡其歡。不理家人事産。年六十三。以天曆戊辰。卒于家。夫人三韓國大夫人李氏。左僕射諱湊之孫。國學祭酒諱行儉之女。族大德茂。克配君子。生五男三女。今皇后其季也。謹按奇氏。自國初以武材稱。世著其勞。及仁王妣任氏生毅,明,神三王。號恭睿王太后。而公之祖母。實后弟平章諱濡之孫。判事諱景恂之女。自是任奇兩姓。益大以貴。甲於東國。侍中康靖。以冢宰相毅,明,神。當毅王末年。武人鄭仲夫作亂。殲朝臣擅廢立。自是權臣繼踵。搢紳重足。而能從容以道。終始扶持。不失舊物。侍中之力居多矣。僕射慷慨持節義。當國步艱難。晉陽公崔怡顓擅。雖連姻權臣。不肯阿諛。每曉以逆順禍福。姦不得發。怡旣病。其子沆不肖。人多附沆。而僕射獨疾之。怡甞問後於人。僕射卽擧賢以對。及沆嗣。以前嫌見斥。飮恨以卒。時人惜之。三司始諱璋。後避國諱更焉。初以將軍出爲忠州牧。專尙寬和。蒲鞭薤水。民不忍欺。政最召拜上將軍。俄遷鷹揚軍。國制。凡軍政賞罰。將校進退。一聽於鷹揚。三司不私其恩威。動以禮法。軍士感服。由是驟登相府。忠烈王以巨室國老。尤加禮貌。哀榮無及焉者。公之妣延興郡夫人朴氏。典法判書諱暉之女。侍中李文眞公藏用之外孫也。至元元年。有詔今歲王公群牧。咸會上都。王其乘驛而朝。文眞以平章。從忠烈王入覲。寵遇異常。文眞德業文章。聞于中國。時右丞相東平忠憲王。甚器重之。待以殊禮。坐必虛其右。翰林王學士諸公。歆其風裁。皆願內交。凡所對揚休命。與本國興利除害者。民到于今賴之。公內外皆名家。由高祖門下侍郞平章事諱守全以下。出入將相。功施于民。而不食舊德。卒於下位。天將大其報。而有待于後乎。長男軾。先公歿。次輒。以僉議政丞。今封德城府院君。次轅。以僉議贊成事。今封德陽君。次輈。大匡元尹。次輪。右常侍。長女適商議評理趙希忠。次適典議令廉敦紹。孫男凡十一。長天麟。小字完澤普化。以版圖揔郞入侍輦轂。今爲直省舍人。次仁傑。小字帖睦邇溥化。以軍簿揔郞。宿衛闕庭。次天驥,有傑,田龍。皆郞將。餘未仕。孫女七。長適弘福都監判官洪寶環。餘皆幼。公之家世功德。載在國史。公之事業。焯焯在人耳目。今掇其大槩爲行狀。以備采擇焉。至正▣▣八月初一日。謹狀。
공(公)의 이름은 자오(子敖)이고, 자(字)도 자오(子敖)이다.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가문의 공훈으로 산원(散員) 벼슬을 받았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년, 충렬왕 16년)에 반역을 일으킨 원나라 왕족 나얀(乃顔)의 잔당 하단(哈丹)이 무리를 이끌고 동쪽 진번(眞番)으로 달아나 우리 국경을 침범했다.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사납고 성하여, 이르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충렬왕은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제국대장공주)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그 날카로운 기세를 피했다. 각 주와 군에서는 모두 험난한 지형에 의지해 싸우면서 성을 지키니, 나라 안팎이 몹시 소란스럽고 두려움에 떨었다. 공은 당시 중군(中軍)의 편장(偏將)이 되어 대장기를 짊어지고 선봉에 서서 제법 큰 공을 세웠다.
도적들이 평정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산랑(揔部散郞)이 되었고, 나가서 선주(宣州)를 지켰는데, 다스림이 직분에 알맞아 백성들이 떠나간 그를 그리워했다.
공은 스스로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奕世衣冠) 출신이면서도 벼슬이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성품 또한 너그럽고 후덕했으며, 권세가에 빌붙어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더불어 노닐며 온전히 그 즐거움을 다하려 힘썼고, 집안의 재산 관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63세가 되던 천력(天曆) 무진년(1328년, 충숙왕 15년)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주(李湊)의 손녀이자 국학제주(國學祭酒)를 지낸 이행검(李行儉)의 딸이다. 가문이 번창하고 덕이 무거워 군자(기자오)의 배필이 될 만했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기황후)가 바로 그 막내딸이다.
삼가 살피건대, 기씨(奇氏) 가문은 고려 초부터 무예의 재능으로 칭송받아 대대로 그 공로를 드러냈다. 고려 인종의 비(妃)인 임씨(任氏)가 의종, 명종, 신종 세 임금을 낳아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 일컬어졌는데, 공의 할머니가 실은 태후의 동생인 평장사 임유(任濡)의 손녀이자 판사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는 더욱 번창하고 귀해져 동방(고려)에서 으뜸가는 갑족이 되었다.
시중(侍中)을 지낸 강정공(康靖公)은 총재(冢宰, 총리)로서 의종, 명종, 신종을 보필했다. 의종 말년에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조정 신하들을 몰살하고 왕을 마음대로 폐하고 세웠다. 이때부터 권신들이 대를 이어 권력을 잡고 선비들이 두려워 발을 포개고 섰으나, (강정공은) 도리로서 침착하게 대처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왕실을 붙들어 옛 국가의 체제를 잃지 않게 하니, 시중(강정공)의 힘이 가장 컸다.
복야(僕射, 기자오의 조부 기윤숙)는 강개하고 절개와 의리를 지켰다. 나라의 운명이 간고하고 난처할 때에 진양공 최이(崔怡, 최우)가 권력을 독점했다. 비록 권신(최우)과 혼인으로 얽혀 있었으나 결코 아첨하지 않았으며, 매번 거역과 순종, 화와 복의 이치를 깨우쳐 주어 간사한 짓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최이가 병이 들자 그 아들 최항(崔沆)이 어리석고 불초했으나, 많은 사람이 최항에게 아부했다. 그러나 복야만은 홀로 그를 미워했다. 최이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를 물었을 때, 복야는 곧바로 어진 이를 천거하여 대답했다. 최항이 권력을 이어받자 예전의 혐오감 때문에 배척을 당했고,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삼사사(三司使)를 지낸 (기자오의 아버지)는 처음 이름이 장(璋)이었으나, 후에 국휘(임금의 이름)를 피하여 이름을 고쳤다. 처음에 장군으로서 나아가 충주목사(忠州牧)가 되었는데, 오로지 너그럽고 화평함을 숭상하여 채찍 대신 부들나무로 벌하고 부드럽게 다스리니(蒲鞭薤水), 백성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다. 정치의 성적이 가장 좋아 조정으로 불러 올려져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고, 곧 응양군(鷹揚軍)으로 옮겼다. 나라의 제도에 군사의 정사와 상벌, 장교의 진퇴는 모두 응양군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었는데, 삼사사(기장)는 그 은혜와 위엄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고 매사 예법으로써 행동하니 군사들이 감복했다. 이로 말미암아 재상의 반열(상부)에 급격히 올랐다. 충렬왕은 그를 거물급 가문의 국로(國老)로 여겨 더욱 예우를 더했으니, 그 애도함과 영예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의 어머니는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로, 전법판서 박휘(朴暉)의 딸이며 시중 이장용(李藏用, 문진공)의 외손녀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년)에 "올해에 왕과 공들, 그리고 여러 목축 관리들은 모두 상도(上都)로 모이라"는 원나라 황제의 조서가 내려져, 왕이 역말을 타고 조참하러 가게 되었다. 이장용(문진공)은 평장사로서 충렬왕을 수행하여 들어가 황제를 알현했는데, 총애를 받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은 중국(원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우승상이었던 동평충헌왕(바얀)이 그를 매우 그릇이 큰 인물로 아껴 특별한 예로 대우했으며, 자리에 앉을 때 반드시 우측 자리를 비워두고 모셨다. 한림원의 왕학사 등 여러 공들도 그의 풍채와 지조를 흠모하여 모두 사사로이 교제하기를 원했다. 그가 (황제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어 대답하고 아뢴 것과, 본국(고려)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한 것들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에 의지하고 있다.
공은 이처럼 안팎이 모두 명문가였다. 고조부인 문하시랑평장사 기수전(奇守全) 이하로 조상들이 장상(將相, 장군과 재상)을 드나들며 백성들에게 공을 베풀었으나, 정작 공은 조상의 덕만을 누리지 못하고 낮은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는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내리려고 후손을 기다리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첫째 아들 기식(奇軾)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아들 기철(奇轍)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이며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셋째 아들 기원(奇轅)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다.
넷째 아들 기주(奇興)는 대광 원윤(元尹)이다.
다섯째 아들 기윤(奇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첫째 딸은 상의평리 조희충(趙希忠)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전의령 염돈소(廉敦紹)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11명이다.
첫째 손자 천린(天麟)은 어릴 때 이름이 완택푸화(完澤普化, 올제이부카)인데, 판도총랑으로서 황제의 수레(輦轂)를 가까이서 모셨고 지금은 직성사인(直省舍人)이다.
둘째 손자 인걸(仁傑)은 어릴 때 이름이 첩목이부화(帖睦邇溥化, 테무르부카)인데, 군부총랑으로서 궐정을 숙위(경호)하고 있다.
다음 손자인 천기(天驥), 유걸(有傑),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다.
나머지는 아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손녀는 7명이다.
첫째 손녀는 홍복도감판관 홍보환(洪寶環)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가세(家世)와 공덕은 국사에 실려 있고, 공의 업적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명백히 남아 있다. 이제 그 대략적인 개요를 모아 행장(行狀)을 지어 채택에 대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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