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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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2차 戊辰族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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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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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2차-戊辰族譜序

吾奇氏豈無譜也? 蓋古有而今亡矣. 吾奇譜豈久不述也? 前後諸族, 咸致力而未及完. 今南中族人輩, 修潤其前後之所未完者十二三, 而譜乃成. 諸族之於譜, 可謂勤且勞矣.
雖然, 吾族人亦知吾譜之有裨於世敎也耶? 盖吾奇實本於殷太師箕子. 玄胄杳茫, 今雖難稽, 而箕子爲奇, 史不可誣. 幸州之後, 自始祖迄今, 系牒不差. 其在麗朝, 世有令德, 功施于世. 而及至數世, 氏大數盛, 名位太過, 顧有盛滿之戒. 不幸轍 輪持國命, 而爲蘖芽矣, 極而圯, 理亦固然.
噫! 痛矣! 當此時, 雖以吾祖先之積善餘慶, 亦無以救焉. 賴有我貞武公出, 而奇氏實再造矣.
何者? 昔韓之張氏, 五世而有子房者出, 然後人始知有張氏. 晉之陶氏, 數公而有淵明者出, 然後世始知有陶氏. 夫張與陶之先, 豈無達官大爵? 而必待二公而顯者, 豈不以二公之偉節淸風, 本於天命民坛之不泯, 有以撑柱綱常, 扶植世敎而然也?
人苟知貞武之於張陶二公, 異世而相符, 殊道而同歸, 則非徒信吾奇之再造, 而亦知吾譜之有裨於世敎也, 審矣. 嗚呼! 吾祖之偉節淸風, 而其可泯耶? 若言其槪, 則公之學行, 本於《庸》、《學》, 旣純且正, 而得際遇於我世廟(세종), 位躋一品, 而歷文至魯矣.
嗚呼! 《易》曰: "知微知彰, 萬夫之望." 獨見幾於急流, 未五十而致仕, 非知微而能然乎? 目不逃於刃刺, 竟全節於溝壑, 非知彰而能然乎? 志無負於六臣, 而事尤難於先退. 實有萬夫之望, 而幾乎無得而稱. 宜乎世徒知六臣之忠之烈, 而不深知吾祖之節之高爲難及也. 悲夫!
抑又聞鄭松江 稱金河西 曰: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夫賢如松江, 而東方出處之正, 稱獨於河西, 其非考未詳而泛稱之耶? 愚竊以爲, 前貞武而後河西, 庸何傷於並美? 所謂其揆一也.
且公有賢孫德陽·高峰 二公, 皆以道學文章, 爲我東宗儒. 是亦豈非醴泉之流, 而興吾宗者耶? 夫如是, 則觀吾譜者, 又庶幾不以今之陵替無人, 輕吾譜, 而顧吾瑣瑣零丁之孫, 盍亦知勉?
嗚呼! 國朝之名儒列卿, 今古何限? 而空言不若著之行事. 故吾之陳世德, 必舉張陶二公, 以及夫數先生者, 豈無意乎? 言之匪誇, 謹待篤論之君子. 譜將印, 族人咸屬余爲序.

我 肅宗十四年(1688) 後孫 挺翼 參奉 松巖

우리 기씨(奇氏)에게 어찌 족보가 없었겠는가? 대개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우리 기씨 족보를 어찌 오랫동안 기술하지 않았겠는가? 전후의 여러 일가들이 모두 힘을 기울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이제 영남과 호남(남중)의 문중 사람들이 그 전후에 완성하지 못했던 10분의 2~3을 보완하고 다듬어서 마침내 족보가 이루어졌다. 여러 문중이 족보에 쏟은 정성이 참으로 부지런하고 수고롭다 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 문중 사람들이 또한 우리 족보가 세상의 가르침(世敎)에 도움이 됨이 있음을 아는가? 대개 우리 기씨는 실로 은나라 태사 기자(箕子)에 근본을 두고 있다. 먼 후손들의 계보가 아득하여 지금 비록 고증하기는 어려우나, 기자가 기씨가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행주 기씨로 갈라져 나온 뒤에는 시조로부터 지금까지 계보가 틀림이 없다. 고려 시대에 대대로 아름다운 덕이 있었고 공로를 세상에 베풀었다. 그러나 몇 대에 이르러 가문이 커지고 운수가 성하며 명예와 지위가 너무 지나치게 되니, 도리어 가득 차면 넘친다는 경계가 있게 되었다. 불행히도 기철(奇轍) 등이 나라의 운명을 쥐고 흔들며 (역적의) 싹이 되었고, 극에 달해 무너졌으니 이치상 당연한 일이었다.

슬프고 통탄스럽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선행과 그 남은 경사(積善餘慶)가 있었을지라도 가문을 구제할 길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정무공(貞武公, 기건)께서 나오시어 기씨 가문을 실로 다시 세우셨다(再造).

어째서인가? 옛날 한나라의 장씨는 5대 만에 장자방(장량) 같은 이가 나온 뒤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장씨가 있음을 알았다. 진나라의 도씨는 몇 분의 공을 지나 도연명 같은 이가 나온 뒤에야 세상이 비로소 도씨가 있음을 알았다. 저 장씨와 도씨의 선조에 어찌 높은 관직과 큰 벼슬을 한 자가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반드시 두 공을 기다려 가문이 드러난 것은, 어찌 두 공의 위대한 절개와 맑은 풍모가 천명과 인륜의 없어지지 않는 본질에 근거하여 강상(綱常)을 지탱하고 세교를 붙들어 세웠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만약 정무공이 저 장자방이나 도연명 두 공과 시대는 다르나 부합하고, 길은 다르나 귀결점은 같음을 안다면, 비단 우리 기씨 가문이 다시 세워졌음을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족보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됨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아! 우리 조상의 위대한 절개와 맑은 풍모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대략을 말하자면, 공의 학문과 행실은 《중용》과 《대학》에 근본을 두어 순수하고도 발랐으며, 세종대왕을 만나 지위가 1품에 올랐고 문학적 명성은 노나라(공자의 고향)에 이를 정도였다.

아!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아는 것이 만백성의 우러름이 된다]고 하였다. 홀로 급류 속에서 기미를 보고 50세도 되지 않아 벼슬에서 물러나셨으니, 기미를 아는(知微) 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셨겠는가? 칼날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내 구렁텅이에서 절개를 지키셨으니, 드러난 도리를 아는(知彰) 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셨겠는가? 뜻은 사육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으나, 일은 (남들보다) 먼저 물러나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실로 만백성의 우러름을 받으셨으나 거의 드러내어 칭송하지 않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단지 사육신의 충절만 알고 우리 조상의 절개 높음이 미치기 어려움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 마땅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또 듣기로 송강 정철이 하서 김인후를 칭송하며 이르기를 [동방(조선)에 나아감과 물러남(出處)이 바른 이는 오직 잠재옹(김인후)뿐이다]라고 하였다. 송강처럼 현명한 이가 조선에서 나아가고 물러남의 올바름을 유독 하서에게만 일컬었으니, 그것은 자세히 고찰하지 못하고 막연히 일컬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앞선 정무공과 뒤의 하서공이 어찌 함께 아름다움을 나란히 하는 데 방해가 되겠는가? 이른바 그 법도(揆)는 하나인 것이다.

또한 공에게는 어진 손자인 덕양(기준)과 고봉(기대승) 두 공이 계시니, 모두 도학과 문장으로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유학자(宗儒)가 되셨다. 이 또한 어찌 단 샘물(醴泉)의 흐름이 아니며 우리 문중을 일으킨 분들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으니, 우리 족보를 보는 자들이 또한 지금 가문이 쇠퇴하여 인물이 없다고 해서 우리 족보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나같이 보잘것없고 외로운 후손들도 어찌 힘쓸 줄을 모르겠는가?

아! 우리 조정의 이름난 유학자와 높은 경상(卿相)들이 고금에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마는, 빈말은 실제로 행한 일을 기록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내가 조상의 덕을 진술하면서 반드시 장자방과 도연명 두 공, 그리고 여러 선생을 거론한 것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하는 말이 자랑이 아니니, 삼가 식견 높은 군자의 정당한 논평을 기다린다. 족보를 인쇄하려 함에 일가들이 모두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우리 숙종 14년(1688년) 후손 정익(참봉, 호 송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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