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년 3차 甲午舊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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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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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3차-甲午舊譜序
奇氏之先, 出自箕子. 按《史記》: 箕子與微子, 皆姓子氏. 微子旣歿, 而其子孫散處中國, 爲商氏、殷氏、宋氏、皇父氏、華氏、向氏、載氏、樂氏、孔氏, 凡九姓, 而孔氏特著.
箕子東封朝鮮, 傳國四十有一世, 遷于金馬. 又歷八世, 至元王, 始國除, 而其子得姓者三: 曰鮮于氏, 曰韓氏, 曰奇氏. 而獨奇氏之系, 旣詳且遠, 與中國之孔氏無以異焉.
然中國之人, 自三代時皆有世譜. 攷於《周官》之奠繫世, 而其制可見也. 而東人之爲譜也, 昉于高麗之式目焉. 則奇氏之能獨詳其先系, 泝之累千歲而無缺者, 豈不誠異乎哉!
今奇氏之宗, 有能繼修其譜者, 司諫院右正言彦鼎甫, 實主其事. 譜旣成, 問序於㻐. 㻐覽而歎曰: 盛哉譜也! 得聖人爲之祖, 而又有服齋高峰 二先生, 以道學名世. 爲奇氏者, 其孰不夙夜警勵, 上繼二先生不怠, 以及於聖人哉!
而譜者, 一家之文獻耳. 譜修則代明, 代明則德著, 德著而先祖之心可跡, 先祖之心可跡, 而子孫之則在是矣. 譜豈徒然哉! 《詩》曰: 無念爾祖. 其勉之哉!
噫! 昔夫子之宋得《乾坤》焉. 奇氏之於箕子, 猶殷之有宋也. 苟使夫世其文獻而不墜, 則異日中國有聖人者作, 而求觀乎箕子之遺禮, 吾知其必徵諸奇氏. 遂書以爲《奇氏族譜》序.
我 英宗五十年 趙璥 初名 俊 荷捿
기씨(奇氏)의 선조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오셨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기자와 미자(微子)는 모두 성이 자씨(子氏)였다. 미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자손들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며 상씨(商氏), 은씨(殷氏), 송씨(宋氏), 황보씨(皇父氏), 화씨(華氏), 향씨(向氏), 재씨(載氏), 악씨(樂氏), 공씨(孔氏) 등 무릇 아홉 성씨가 되었는데, 그중 공씨가 특히 두드러졌다.
기자께서 동쪽 조선에 봉해진 뒤 나라를 전수하기를 41세(世) 동안 하셨고, (그 뒤 준왕이) 금마(金馬, 지금의 익산)로 옮겨갔다. 다시 8세를 거쳐 원왕(元王)에 이르러 비로소 나라가 없어졌는데, 그 아들들이 성을 얻은 것이 셋이니 곧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 기씨(奇氏)이다. 그런데 유독 기씨의 계보만이 이미 상세하고도 멀리까지 이어져 내려와, 중국의 공씨(孔氏)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하·은·주 삼대(三代) 시절부터 모두 가문의 계보인 세보(世譜)가 있었다. 《주관(周官)》의 전계세(奠繫世, 계통을 정하는 관직)를 상고해 보면 그 제도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 동방(우리나라) 사람들이 족보를 만든 것은 고려 시대의 식목(式目)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기씨 가문이 유독 그 선조의 계통을 상세히 하여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빠짐이 없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기씨 문중에 그 족보를 이어 닦는 이가 있으니, 사간원 우정언 기언정(奇彦鼎) 군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족보가 완성되자 나(조경)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족보를 살펴보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성대하도다, 이 족보여! 성인(기자)을 조상으로 모셨고, 또한 복재(기준)와 고봉(기대승) 두 선생께서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다. 기씨 된 자로서 그 누가 밤낮으로 경계하고 힘써서, 위로는 두 선생의 뜻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어받아 성인의 경지에까지 미치려 하지 않겠는가!]
모든 족보라는 것은 한 가문의 문헌일 뿐이다. 족보가 닦여지면 대수(代數)가 밝아지고, 대수가 밝아지면 조상의 덕이 드러나며, 덕이 드러나면 선조의 마음을 발자취 따라 찾을 수 있고, 선조의 마음을 찾을 수 있으면 자손이 본받을 법칙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된다. 족보가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그대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부디 힘쓸지어다!
아! 옛날 공자께서 (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에 가셔서 《건(乾)》과 《곤(坤)》의 도를 얻으셨다. 기씨에게 기자가 있음은 은나라 후손에게 송나라가 있음과 같다. 진실로 그 문헌을 대대로 전하여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훗날 중국에 성인이 나타나 기자가 남긴 예법(遺禮)을 보고자 구할 때, 나는 반드시 우리 기씨 가문에서 그것을 증명해낼 것임을 안다. 이에 글을 써서 《기씨족보》의 서문으로 삼는다..
我 英宗五十年 조경趙璥 처음이름初名 준俊 荷捿
奇氏之先, 出自箕子. 按《史記》: 箕子與微子, 皆姓子氏. 微子旣歿, 而其子孫散處中國, 爲商氏、殷氏、宋氏、皇父氏、華氏、向氏、載氏、樂氏、孔氏, 凡九姓, 而孔氏特著.
箕子東封朝鮮, 傳國四十有一世, 遷于金馬. 又歷八世, 至元王, 始國除, 而其子得姓者三: 曰鮮于氏, 曰韓氏, 曰奇氏. 而獨奇氏之系, 旣詳且遠, 與中國之孔氏無以異焉.
然中國之人, 自三代時皆有世譜. 攷於《周官》之奠繫世, 而其制可見也. 而東人之爲譜也, 昉于高麗之式目焉. 則奇氏之能獨詳其先系, 泝之累千歲而無缺者, 豈不誠異乎哉!
今奇氏之宗, 有能繼修其譜者, 司諫院右正言彦鼎甫, 實主其事. 譜旣成, 問序於㻐. 㻐覽而歎曰: 盛哉譜也! 得聖人爲之祖, 而又有服齋高峰 二先生, 以道學名世. 爲奇氏者, 其孰不夙夜警勵, 上繼二先生不怠, 以及於聖人哉!
而譜者, 一家之文獻耳. 譜修則代明, 代明則德著, 德著而先祖之心可跡, 先祖之心可跡, 而子孫之則在是矣. 譜豈徒然哉! 《詩》曰: 無念爾祖. 其勉之哉!
噫! 昔夫子之宋得《乾坤》焉. 奇氏之於箕子, 猶殷之有宋也. 苟使夫世其文獻而不墜, 則異日中國有聖人者作, 而求觀乎箕子之遺禮, 吾知其必徵諸奇氏. 遂書以爲《奇氏族譜》序.
我 英宗五十年 趙璥 初名 俊 荷捿
기씨(奇氏)의 선조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오셨다. 사기(史記)를 살펴보면, 기자와 미자(微子)는 모두 성이 자씨(子氏)였다. 미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자손들이 중국 각지에 흩어져 살며 상씨(商氏), 은씨(殷氏), 송씨(宋氏), 황보씨(皇父氏), 화씨(華氏), 향씨(向氏), 재씨(載氏), 악씨(樂氏), 공씨(孔氏) 등 무릇 아홉 성씨가 되었는데, 그중 공씨가 특히 두드러졌다.
기자께서 동쪽 조선에 봉해진 뒤 나라를 전수하기를 41세(世) 동안 하셨고, (그 뒤 준왕이) 금마(金馬, 지금의 익산)로 옮겨갔다. 다시 8세를 거쳐 원왕(元王)에 이르러 비로소 나라가 없어졌는데, 그 아들들이 성을 얻은 것이 셋이니 곧 선우씨(鮮于氏), 한씨(韓氏), 기씨(奇氏)이다. 그런데 유독 기씨의 계보만이 이미 상세하고도 멀리까지 이어져 내려와, 중국의 공씨(孔氏)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하·은·주 삼대(三代) 시절부터 모두 가문의 계보인 세보(世譜)가 있었다. 《주관(周官)》의 전계세(奠繫世, 계통을 정하는 관직)를 상고해 보면 그 제도를 볼 수 있다. 반면 우리 동방(우리나라) 사람들이 족보를 만든 것은 고려 시대의 식목(式目)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기씨 가문이 유독 그 선조의 계통을 상세히 하여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빠짐이 없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기씨 문중에 그 족보를 이어 닦는 이가 있으니, 사간원 우정언 기언정(奇彦鼎) 군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족보가 완성되자 나(조경)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족보를 살펴보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성대하도다, 이 족보여! 성인(기자)을 조상으로 모셨고, 또한 복재(기준)와 고봉(기대승) 두 선생께서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다. 기씨 된 자로서 그 누가 밤낮으로 경계하고 힘써서, 위로는 두 선생의 뜻을 게을리하지 않고 이어받아 성인의 경지에까지 미치려 하지 않겠는가!]
모든 족보라는 것은 한 가문의 문헌일 뿐이다. 족보가 닦여지면 대수(代數)가 밝아지고, 대수가 밝아지면 조상의 덕이 드러나며, 덕이 드러나면 선조의 마음을 발자취 따라 찾을 수 있고, 선조의 마음을 찾을 수 있으면 자손이 본받을 법칙이 바로 여기에 있게 된다. 족보가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찌 그대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부디 힘쓸지어다!
아! 옛날 공자께서 (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에 가셔서 《건(乾)》과 《곤(坤)》의 도를 얻으셨다. 기씨에게 기자가 있음은 은나라 후손에게 송나라가 있음과 같다. 진실로 그 문헌을 대대로 전하여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훗날 중국에 성인이 나타나 기자가 남긴 예법(遺禮)을 보고자 구할 때, 나는 반드시 우리 기씨 가문에서 그것을 증명해낼 것임을 안다. 이에 글을 써서 《기씨족보》의 서문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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