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년 3차 甲午譜跋 갑오보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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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3차-甲午譜跋
吾奇氏有譜尚矣。粵在甲辰印海西,繼而戊辰印於湖南,而皆不免本系疎漏、外裔淆雜之失,宗人病之。
壬辰春,始定修潤改正之議,來會京師,付諸剞劂。氏族姪錫后手實主其事,工力緜、辛勤拮据,越三年始乃告訖。
旣成,余盥手開卷,竊有所感焉。非徒感之,又有所敬焉。
盖吾奇氏遠自羅麗,世有達官,功施于民,而年代旣邈,文獻無徵。逮于本朝,有若眩菴貞武公,擢自布衣,位躋一品,高風峻節,壁立千仞,炳幾先退,生爲六臣,以啓我後人。
而德陽、高峰二先生出焉,鵠立明庭,治遵三古。雖時運艱顚,不能展布其一二,而若其闡明斯道、扶植世敎之功,光垂于簡策,南指於後學。
至若三綱公之至行,無愧乎王祥之躍鯉;德豐君之殉節,有光於遼伯之取熊。而又有錦江、松巖、鳴灘、樂菴諸公,隱德林泉,專心墳典,清高之操、堅介之行,爲鄕里之敬服,作一道之矜式。吾門之稱以名族,顧不在兹歟?
鳴呼!世代推遷,家運凌遲。顧今殘孫冷裔,飢餓困窮,衣食於奔走,弁髦於名檢,百年故家遺風蕩然,不知派系之所自分,敦睦之爲何義,況敢望追念先訓、克趾前美乎?此余之所深憂永歎,必汲汲於修明譜牒,而以三數公文字弁之于卷首者也。
凡我同譜之人,尚念于兹。在家則追錦江、松巖、鳴灘、樂菴諸君子之飾身修行;立朝則慕眩菴、德陽、高峰三先生之匡時範俗;事親則法三綱公之竭力;供職不幸而遇難,則捐身殉國,如德豐君之辦得大節。
然後可以無忝其所生,而三載旅館殫精校讐之意,亦將不歸於虛地矣。
譜成之日,族人請余置一言于卷端,聊以此勉諸族人而以自警云。
後孫 彦鼎 判書
우리 기씨(奇氏) 가문에 족보가 있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갑진년(1664년)에 해서(황해도)에서 인쇄하여 간행하고, 이어 무진년(1688년)에 호남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으나, 모두 본계(本系)가 소홀하고 외손들이 섞여 들어가는 실수를 면치(免) 못하니 종친들이 이를 걱정해 왔다.
임진년(1772년) 봄에 비로소 보수하고 다듬어 바로잡기로 논의가 정해져 경성(서울)에 모여 인쇄를 맡겼다. 족질(族姪) 석후(錫后)가 직접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오랫동안 노력과 정성을 들여 매우 고생스럽고 애써 고생한 지 3년 만에 비로소 마쳤음을 알리게 되었다.
족보가 완성된 후 내가 손을 씻고 책을 펴보니 가슴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단지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 또한 생겨났다. 대저 우리 기씨는 멀리 신라와 고려 시대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백성에게 공을 세운 분들이 계셨으나, 연대가 이미 멀고 문헌 증거가 없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현암(기건) 정무공께서는 포의에서 발탁되어 지위가 1품에 이르셨고, 고결한 풍모와 높은 절개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섰으며, 기미를 밝게 살펴 먼저 물러나 생육신이 되어 우리 후손들을 열어주셨다. 이후 덕양(기준), 고봉(기대승) 두 선생이 나오시어 조정에 우뚝 서서 다스림을 고대 성현의 도에 맞추셨다. 비록 시운이 어렵고 뒤틀려 그 포부를 백 분의 일도 펼치지 못하셨으나, 성리학의 도를 밝히고 세상을 가르친 공적은 역사에 빛나고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삼강공(기응세)의 지극한 효행은 왕상의 약리(잉어 잡이)에 부끄러움이 없고, 덕풍군(기협)의 순절은 요백이 곰을 잡는 용맹보다 빛난다. 그리고 금강(기효간), 송암(기정익), 명탄(기정낙), 낙암(기정룡) 여러 공께서는 수풀 아래 은거하며 덕을 쌓고 경전(墳典)에 전심하셨으니, 청고한 지조와 굳건한 행실은 향리의 존경을 받았고 온 도(道)의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 가문이 명문가라 일컬어지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슬프다! 세대가 바뀌고 가운(家運)이 쇠락하여, 지금 남은 후손들은 굶주리고 곤궁하여 먹고사는 일에 분주하며 명예와 염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백 년 명문가의 유풍이 씻은 듯 사라져 파계(派系)가 나뉘는 바를 알지 못하고 화목의 의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하물며 감히 선조의 가르침을 추념하고 앞선 미덕을 이어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며 반드시 족보를 수정하고 밝히는 일에 급급했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두세 어른의 글을 권두에 실어 놓는다. 무릇 우리 문중의 사람들은 이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금강·송암·명탄·낙암 여러 군자의 몸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음을 쫓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현암·덕양·고봉 세 선생의 시대를 바로잡고 풍속의 모범이 됨을 사모하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삼강공의 힘을 다함을 본받고, 불행히 난리를 만나면 몸을 바쳐(捐身) 나라를 위해 순절하여 대절을 지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조상님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3년 동안 타향 여관에 머물며 정신을 쏟아 교정한 정성 또한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족보가 완성된 날에 일가들이 나에게 책 끝에 한마디 남겨달라고 청하기에, 애오라지 이것으로써 여러 문중 사람들을 권면하고 나 또한 스스로 경계하노라.
후손 기언정(奇彦鼎) 판서(判書) 씀.
吾奇氏有譜尚矣。粵在甲辰印海西,繼而戊辰印於湖南,而皆不免本系疎漏、外裔淆雜之失,宗人病之。
壬辰春,始定修潤改正之議,來會京師,付諸剞劂。氏族姪錫后手實主其事,工力緜、辛勤拮据,越三年始乃告訖。
旣成,余盥手開卷,竊有所感焉。非徒感之,又有所敬焉。
盖吾奇氏遠自羅麗,世有達官,功施于民,而年代旣邈,文獻無徵。逮于本朝,有若眩菴貞武公,擢自布衣,位躋一品,高風峻節,壁立千仞,炳幾先退,生爲六臣,以啓我後人。
而德陽、高峰二先生出焉,鵠立明庭,治遵三古。雖時運艱顚,不能展布其一二,而若其闡明斯道、扶植世敎之功,光垂于簡策,南指於後學。
至若三綱公之至行,無愧乎王祥之躍鯉;德豐君之殉節,有光於遼伯之取熊。而又有錦江、松巖、鳴灘、樂菴諸公,隱德林泉,專心墳典,清高之操、堅介之行,爲鄕里之敬服,作一道之矜式。吾門之稱以名族,顧不在兹歟?
鳴呼!世代推遷,家運凌遲。顧今殘孫冷裔,飢餓困窮,衣食於奔走,弁髦於名檢,百年故家遺風蕩然,不知派系之所自分,敦睦之爲何義,況敢望追念先訓、克趾前美乎?此余之所深憂永歎,必汲汲於修明譜牒,而以三數公文字弁之于卷首者也。
凡我同譜之人,尚念于兹。在家則追錦江、松巖、鳴灘、樂菴諸君子之飾身修行;立朝則慕眩菴、德陽、高峰三先生之匡時範俗;事親則法三綱公之竭力;供職不幸而遇難,則捐身殉國,如德豐君之辦得大節。
然後可以無忝其所生,而三載旅館殫精校讐之意,亦將不歸於虛地矣。
譜成之日,族人請余置一言于卷端,聊以此勉諸族人而以自警云。
後孫 彦鼎 判書
우리 기씨(奇氏) 가문에 족보가 있은 지 오래되었다. 지난 갑진년(1664년)에 해서(황해도)에서 인쇄하여 간행하고, 이어 무진년(1688년)에 호남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으나, 모두 본계(本系)가 소홀하고 외손들이 섞여 들어가는 실수를 면치(免) 못하니 종친들이 이를 걱정해 왔다.
임진년(1772년) 봄에 비로소 보수하고 다듬어 바로잡기로 논의가 정해져 경성(서울)에 모여 인쇄를 맡겼다. 족질(族姪) 석후(錫后)가 직접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오랫동안 노력과 정성을 들여 매우 고생스럽고 애써 고생한 지 3년 만에 비로소 마쳤음을 알리게 되었다.
족보가 완성된 후 내가 손을 씻고 책을 펴보니 가슴 깊이 느끼는 바가 있었다. 단지 감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 또한 생겨났다. 대저 우리 기씨는 멀리 신라와 고려 시대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에 올라 백성에게 공을 세운 분들이 계셨으나, 연대가 이미 멀고 문헌 증거가 없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 현암(기건) 정무공께서는 포의에서 발탁되어 지위가 1품에 이르셨고, 고결한 풍모와 높은 절개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섰으며, 기미를 밝게 살펴 먼저 물러나 생육신이 되어 우리 후손들을 열어주셨다. 이후 덕양(기준), 고봉(기대승) 두 선생이 나오시어 조정에 우뚝 서서 다스림을 고대 성현의 도에 맞추셨다. 비록 시운이 어렵고 뒤틀려 그 포부를 백 분의 일도 펼치지 못하셨으나, 성리학의 도를 밝히고 세상을 가르친 공적은 역사에 빛나고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하였다.
또한 삼강공(기응세)의 지극한 효행은 왕상의 약리(잉어 잡이)에 부끄러움이 없고, 덕풍군(기협)의 순절은 요백이 곰을 잡는 용맹보다 빛난다. 그리고 금강(기효간), 송암(기정익), 명탄(기정낙), 낙암(기정룡) 여러 공께서는 수풀 아래 은거하며 덕을 쌓고 경전(墳典)에 전심하셨으니, 청고한 지조와 굳건한 행실은 향리의 존경을 받았고 온 도(道)의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 가문이 명문가라 일컬어지는 것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슬프다! 세대가 바뀌고 가운(家運)이 쇠락하여, 지금 남은 후손들은 굶주리고 곤궁하여 먹고사는 일에 분주하며 명예와 염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백 년 명문가의 유풍이 씻은 듯 사라져 파계(派系)가 나뉘는 바를 알지 못하고 화목의 의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하물며 감히 선조의 가르침을 추념하고 앞선 미덕을 이어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근심하고 길이 탄식하며 반드시 족보를 수정하고 밝히는 일에 급급했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두세 어른의 글을 권두에 실어 놓는다. 무릇 우리 문중의 사람들은 이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집에 있을 때는 금강·송암·명탄·낙암 여러 군자의 몸을 닦고 행실을 가다듬음을 쫓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현암·덕양·고봉 세 선생의 시대를 바로잡고 풍속의 모범이 됨을 사모하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삼강공의 힘을 다함을 본받고, 불행히 난리를 만나면 몸을 바쳐(捐身) 나라를 위해 순절하여 대절을 지켜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조상님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3년 동안 타향 여관에 머물며 정신을 쏟아 교정한 정성 또한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족보가 완성된 날에 일가들이 나에게 책 끝에 한마디 남겨달라고 청하기에, 애오라지 이것으로써 여러 문중 사람들을 권면하고 나 또한 스스로 경계하노라.
후손 기언정(奇彦鼎) 판서(判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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