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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3차 甲午族譜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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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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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3차-甲午族譜識

辛卯春, 族叔獻納彦觀氏, 抵書于余曰: 吾族舊譜, 極其疎漏, 又多訛舛. 諸宗之欲爲更修者久矣. 今幸有校讐之議, 子與吾弟正言彦鼎, 博攷收諸家之譜牒, 證正前人之未究, 俾述其事可乎? 余敬應曰: 諾.
遂與正言公, 始事于京城外西江上, 盖爲各道收單道里均也. 定各派修單有司, 及各處回論使. 又命執事者一人, 謄出草譜. 舊譜之見漏者或加補入, 別錄者有碑誌、帳籍可據, 則移錄於元譜. 配室墓所, 則比舊加詳. 外孫則删其煩瑣, 限以四代.
於壬辰之五月旣望, 招工入刊. 及秋, 正言公遭服南歸, 其後諸執事稍稍散去, 余亦獨坐無爲也. 竊念此事, 係是一門重擧, 則旣始旋罷, 更待何時乎? 遂留江上.
癸巳春夏, 鳩財足事. 及冬, 正言公千里冒寒, 間闕來會. 又有鼇山宗人重東, 慷慨挺身, 能出死力以助之. 於是事粗辦.
以今歲之暮春, 始得斷手. 派分類別, 彙爲四卷. 雖散在南北不相面者, 一開卷可以瞭然矣. 然則譜事之百年經營, 成於今日, 其亦幸矣! 而前後諸族之致力, 亦可謂勤且勞矣.
嗚呼! 吾奇得姓之後, 遠自羅、麗, 近至國朝, 名賢烈士相望簡策, 爲世名族. 而目今零替劇甚, 不能保一二於千百, 不可哀也歟! 顧余不肖無狀, 不幸而不出於全盛之世, 以承其警咳之餘, 而乃於至否極衰之時, 叨其編修之役, 其亦幸也否乎?
噫! 不有其始, 豈有其終? 於是乎小塞獻納公勤付之責, 而亦可以有辭於吾門矣. 譜成之後, 族人以余有三年之勞, 請敍其顚末, 余敢識之如右云爾.

後孫 錫垕

신묘년(1771년) 봄, 집안 아저씨뻘인 헌납 기언관(奇彦觀) 씨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우리의 옛 족보가 지극히 소홀하고 누락된 것이 많으며 틀린 부분도 많다. 여러 종친이 다시 고쳐 만들고자 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다행히 교정하자는 논의가 있으니, 자네가 내 아우인 정언 기언정(奇彦鼎)과 함께 여러 집안의 보첩(譜牒)을 널리 참고하고 수집하여, 앞서 미처 연구하지 못한 부분들을 증명하고 바로잡아 그 일을 서술해 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공경히 응하며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침내 정언 공과 함께 한양 도성 밖 서강(西江) 위에서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는 각 도에서 단자(가족 기록)를 거두어들이기에 거리가 균등하기 때문이었다. 각 파별로 단자를 수집할 유사(有司)와 각처를 돌며 논의를 전달할 회론사(回論使)를 정했다. 또한 실무자 한 명에게 명하여 초고(草譜)를 베껴 쓰게 했다. 옛 족보에서 누락된 것은 보충해 넣고, 별도로 기록된 것 중 비석 문구나 장적(호적) 등 근거할 만한 자료가 있으면 원 족보로 옮겨 적었다. 부인의 인적 사항과 묘소 위치는 옛날보다 더 상세히 더했다. 외손의 경우는 번거롭고 자잘한 것은 삭제하고 4대까지만으로 제한했다.

임진년(1772년) 5월 16일, 기술자들을 불러 인쇄에 들어갔다. 가을이 되자 정언 공이 상(喪)을 당해 남쪽 고향으로 내려갔고, 그 뒤로 여러 실무자도 점차 흩어지니 나 또한 홀로 앉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 일은 한 문중의 중대한 거사인데, 이미 시작해 놓고 곧바로 그만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서강가에 계속 머물렀다.

계사년(1773년) 봄과 여름에 재물을 모아 일을 하기에 충분하게 마련했다. 겨울이 되자 정언 공이 천 리 길 추위를 무릅쓰고 틈을 내어 다시 찾아와 모였다. 또 오산(鼇山)의 종친 기중동(奇重東)이 강개하게 앞장서서 죽을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이로써 일이 대략 갖추어졌다.

올해(1774년, 갑오년) 늦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손을 뗄(완성할) 수 있었다. 파별로 분류하고 갈래를 나누어 모두 4권으로 묶었다. 비록 남북으로 흩어져 살며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자라도, 책을 한 번 펼치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족보를 만드는 백 년의 경영이 오늘에야 완성된 것이니 이 또한 다행이구나! 전후로 여러 종친이 힘을 쏟은 것 또한 부지런하고 수고로웠다고 할 만하다.

아! 우리 기씨가 성을 얻은 뒤로 멀리는 신라와 고려로부터 가까이는 본조(조선)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어진 이와 열사들이 역사책에 줄을 이어 세상의 명문족벌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가세가 너무나 급격히 기울어 천백 명 중 한두 명도 보존하기 어려우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같이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 불행히도 가문이 전성기일 때 태어나 선조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는 못했으나, 도리어 가장 쇠퇴한 시기에 이 편찬하는 역무를 맡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아! 시작이 없었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로써 헌납 공(기언관)이 간절히 맡기신 책임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 문중에도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족보가 완성된 후 종친들이 내가 3년 동안 고생했다며 그 전말을 서술해 달라 청하기에, 감히 위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후손 석후(錫垕)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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