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차 갑인구보서甲寅舊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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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기회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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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6차-甲寅舊譜序
今之譜法,與古之宗法相表裏。吾奇自受姓以後,歷麗迄我,名賢碩德不絶書於史乘,而根培枝達,源深流長,獨推吾譜者,寔出於世人之公評。
其非祖宗之深仁厚澤累千歲而不斬者耶?嗚呼休哉!
惟我貞武公,爲再基之祖,淸白節義,壁立千仞。德陽、高峰 兩先生繼作,道學文章與東方天壤相爲終始。近得蘆沙 先生,絶學復明,以當一治之運。
往在丙申之修譜,先生秉《春秋》之筆,其規模之簡嚴,綱紀之纖悉,可以質諸鬼神而無疑。及夫庚寅,先生之孫前寢郞宇萬繼而修之,紹先啓後,至矣盡矣。
則嗣是而修譜者,惟遵規矩,事半於古而功必倍矣。
今距庚寅不過二十有五年,而諸宗僉議咸曰:「古云末속易高,險塗難盡。」難易之間,正當明着眼、審着脚。今日之所以着眼着脚者,當以收宗族爲第一義諦。
且夫海西家不入於庚寅譜,每爲之慊然。今復編入,則譬諸江漢之支流,終歸于江漢,又只是元初水。然則向所謂慊然者,卽祖宗均視之心。
以是心爲譜,孝悌之心油然而生,有不待安排而然者。
盖尊祖重宗爲修譜之骨髓,而尊祖重宗之道不外乎孝悌。凡我諸宗,勿以簡編之成爲吾事已了,早夜孜孜,從事於斯,則今日之譜,尤有關於世敎者,其不然哉!
始役於癸丑秋,成於翌年孟夏。諸宗老少一心致力,而始終獨賢者,族孫宰也。宗鉉朽散愚拙,謬居有司之列。譜將印,俾記其顚末,故謹爲序。
後孫 宗鉉
오늘날의 족보 법식은 옛날의 종법(宗法)과 안팎을 이룬다. 우리 기씨(奇氏)가 성(姓)을 받은 이후로 고려 시대를 거쳐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어진 이와 큰 덕을 갖춘 분들이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뿌리가 북돋워져 가지가 뻗어나가고 근원이 깊어 물줄기가 길게 흐르니, 우리 족보를 으뜸으로 추대하는 것은 실로 세상 사람들의 공정한 평판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상님의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이 수천 년 동안 끊이지 않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오직 우리 정무공(기건)께서는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이 되시니, 청렴결백과 절개와 의리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서 있다. 덕양(기준)과 고봉(기대승) 두 선생이 뒤이어 나오시어 도학과 문장이 우리나라의 하늘과 땅과 더불어 시종을 함께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노사(기정진) 선생을 얻어 끊어졌던 학문을 다시 밝히셨으니, 이는 한 시대의 다스려지는 운세를 담당하신 것이다.
지난 병신년의 수보 때 선생(노사)께서 《춘추(春秋)》의 필법을 잡으시니, 그 규모의 간결하고 엄격함과 강기(綱紀)의 상세함은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을 정도였다. 경인년(1890)에 이르러 선생의 손자인 전(前) 침랑 우만(宇萬, 기우만)이 뒤를 이어 보책을 닦으니, 선조를 잇고 후손을 열어줌이 지극하고도 다하였다. 그러니 이후에 족보를 닦는 자들은 오직 그 법도(規矩)를 준수하기만 하면 일은 옛날보다 절반이 줄어들고 공적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이다.
이제 경인보로부터 25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여러 문중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옛말에 말세의 풍속은 높아지기 쉽고 험난한 길은 다 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어려움과 쉬움 사이에서 마땅히 눈을 밝게 뜨고(着眼) 발걸음을 살피며(着脚)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보고 발을 내디뎌야 할 바는 종족을 거두어 합치는 것을 가장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諦)로 삼는 일이다.
저 해서(황해도) 집안이 경인보에 들어오지 못하여 매번 그것이 안타까움(慊然)이 되었는데, 이제 다시 편입시켰다. 이는 비유하자면 한강의 지류가 결국 한강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또한 이것은 원래부터 하나였던 물일 뿐이다. 그러한즉 이전에 안타까워했던 마음이 바로 조상님들께서 자손을 균등하게 보시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족보를 만드니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억지로 안배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대저 조상을 높이고 문중을 중히 여기는 것(尊祖重宗)은 족보를 만드는 골수이며, 조상을 높이고 문중을 중히 여기는 도는 효도와 우애(孝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우리 문중의 모든 이는 족보가 완성된 것으로 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이 도(효제)에 종사해야 한다. 그러면 오늘의 족보는 더욱 세상의 가르침(世敎)에 관계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 일은 계축년(1913)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초여름에 완성되었다. 문중의 노소가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어질게 수고한 자는 족손 재(宰)이다. 나 종현(宗鉉)은 늙고 재주가 없어 어리석고 졸렬함에도 주제넘게 유사의 행렬에 끼어 있었다. 족보를 인쇄하려 함에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므로 삼가 서문을 쓰노라.
후손 종현(宗鉉) 씀.
今之譜法,與古之宗法相表裏。吾奇自受姓以後,歷麗迄我,名賢碩德不絶書於史乘,而根培枝達,源深流長,獨推吾譜者,寔出於世人之公評。
其非祖宗之深仁厚澤累千歲而不斬者耶?嗚呼休哉!
惟我貞武公,爲再基之祖,淸白節義,壁立千仞。德陽、高峰 兩先生繼作,道學文章與東方天壤相爲終始。近得蘆沙 先生,絶學復明,以當一治之運。
往在丙申之修譜,先生秉《春秋》之筆,其規模之簡嚴,綱紀之纖悉,可以質諸鬼神而無疑。及夫庚寅,先生之孫前寢郞宇萬繼而修之,紹先啓後,至矣盡矣。
則嗣是而修譜者,惟遵規矩,事半於古而功必倍矣。
今距庚寅不過二十有五年,而諸宗僉議咸曰:「古云末속易高,險塗難盡。」難易之間,正當明着眼、審着脚。今日之所以着眼着脚者,當以收宗族爲第一義諦。
且夫海西家不入於庚寅譜,每爲之慊然。今復編入,則譬諸江漢之支流,終歸于江漢,又只是元初水。然則向所謂慊然者,卽祖宗均視之心。
以是心爲譜,孝悌之心油然而生,有不待安排而然者。
盖尊祖重宗爲修譜之骨髓,而尊祖重宗之道不外乎孝悌。凡我諸宗,勿以簡編之成爲吾事已了,早夜孜孜,從事於斯,則今日之譜,尤有關於世敎者,其不然哉!
始役於癸丑秋,成於翌年孟夏。諸宗老少一心致力,而始終獨賢者,族孫宰也。宗鉉朽散愚拙,謬居有司之列。譜將印,俾記其顚末,故謹爲序。
後孫 宗鉉
오늘날의 족보 법식은 옛날의 종법(宗法)과 안팎을 이룬다. 우리 기씨(奇氏)가 성(姓)을 받은 이후로 고려 시대를 거쳐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어진 이와 큰 덕을 갖춘 분들이 역사책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뿌리가 북돋워져 가지가 뻗어나가고 근원이 깊어 물줄기가 길게 흐르니, 우리 족보를 으뜸으로 추대하는 것은 실로 세상 사람들의 공정한 평판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상님의 깊은 인자함과 두터운 은택이 수천 년 동안 끊이지 않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도다!
오직 우리 정무공(기건)께서는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이 되시니, 청렴결백과 절개와 의리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우뚝 서 있다. 덕양(기준)과 고봉(기대승) 두 선생이 뒤이어 나오시어 도학과 문장이 우리나라의 하늘과 땅과 더불어 시종을 함께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노사(기정진) 선생을 얻어 끊어졌던 학문을 다시 밝히셨으니, 이는 한 시대의 다스려지는 운세를 담당하신 것이다.
지난 병신년의 수보 때 선생(노사)께서 《춘추(春秋)》의 필법을 잡으시니, 그 규모의 간결하고 엄격함과 강기(綱紀)의 상세함은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을 정도였다. 경인년(1890)에 이르러 선생의 손자인 전(前) 침랑 우만(宇萬, 기우만)이 뒤를 이어 보책을 닦으니, 선조를 잇고 후손을 열어줌이 지극하고도 다하였다. 그러니 이후에 족보를 닦는 자들은 오직 그 법도(規矩)를 준수하기만 하면 일은 옛날보다 절반이 줄어들고 공적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이다.
이제 경인보로부터 25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여러 문중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옛말에 말세의 풍속은 높아지기 쉽고 험난한 길은 다 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어려움과 쉬움 사이에서 마땅히 눈을 밝게 뜨고(着眼) 발걸음을 살피며(着脚)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보고 발을 내디뎌야 할 바는 종족을 거두어 합치는 것을 가장 으뜸가는 진리(第一義諦)로 삼는 일이다.
저 해서(황해도) 집안이 경인보에 들어오지 못하여 매번 그것이 안타까움(慊然)이 되었는데, 이제 다시 편입시켰다. 이는 비유하자면 한강의 지류가 결국 한강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또한 이것은 원래부터 하나였던 물일 뿐이다. 그러한즉 이전에 안타까워했던 마음이 바로 조상님들께서 자손을 균등하게 보시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족보를 만드니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 억지로 안배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
대저 조상을 높이고 문중을 중히 여기는 것(尊祖重宗)은 족보를 만드는 골수이며, 조상을 높이고 문중을 중히 여기는 도는 효도와 우애(孝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릇 우리 문중의 모든 이는 족보가 완성된 것으로 내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이 도(효제)에 종사해야 한다. 그러면 오늘의 족보는 더욱 세상의 가르침(世敎)에 관계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 일은 계축년(1913) 가을에 시작하여 이듬해 초여름에 완성되었다. 문중의 노소가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어질게 수고한 자는 족손 재(宰)이다. 나 종현(宗鉉)은 늙고 재주가 없어 어리석고 졸렬함에도 주제넘게 유사의 행렬에 끼어 있었다. 족보를 인쇄하려 함에 그 전말을 기록하게 하므로 삼가 서문을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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