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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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고봉선생의 돌아가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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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246회 작성일 21-02-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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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의 졸기 (선조수정실록)
《 선조 6년 05/10/01(갑인) / 전 사간원 대사간 기대승의 졸기 》
전 사간원 대사간 기대승이 졸卒하였다. 대승이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었는데, 때마침 황제가 붕어하여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를 보내는 일을 정지하니, 대승이 드디어 결심하고 남쪽으로 귀향하였다.그러나 도중에 볼기에 종기가 나서 고부(古阜) 인우(姻友)의 집에 이르렀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이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제하게 하고 교지를 내려 위유(慰諭)하였으나 미처 당도하기 전에 죽었다.사간원이 아뢰기를, “기대승은 어릴 때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견해가 뛰어났습니다. 이황(李滉)과 서찰을 주고받으면서 성리설(性理設)을 강명하여 선현(先賢)이 미처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으며, 경연에 입시하여 진술한 것은 모두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추대하여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여겼는데, 불행히도 병이 생겨 귀향하다가 도중에서 죽었습니다. 집안이 청한(淸寒)하여 장사를 지낼 수 없으니, 관가에서 상장(喪葬)을 도와주어 국가가 유자(儒者)를 높이고 도를 중시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대승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지기(志氣)가 고매하였다. 어린 아이 때부터 효우(孝友)에 독실하고 행동을 예로써 하였으며, 국상(國喪)이 나면 반드시 곡림(哭臨)하고 졸곡 때까지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였다. 장성한 뒤에는 광범위하게 배우고 뜻을 굳게 지켜 옛 성현처럼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는데, 조예가 고명하고 논의가 영발(英發)했으므로 학자(學者)들이 추중(推重)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 청명(淸名)이 크게 드러나자 이양(李樑)이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그를 꺼려 파직시켰다. 그러나 이양이 패하자 벼슬이 더 높아졌다.금상(今上)이 즉위한 뒤에 맨 먼저 경연에 들어가 국사를 도모하고 잘못을 간하여 임금에게 도움을 준 것이 많았다. 당시는 조정이 혼탁한 뒤라서 사기가 위축되어 있었는데, 새 조정이 대승을 종주(宗主)로 삼고 원왕(冤枉)을 신설(伸雪)하고 현준(賢俊)을 등용하여 조정이 맑아졌으므로, 소기묘(小己卯)라고 불리워졌다. 얼마 후 대신과 의논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을 강론하고 글을 저술하면서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으니 사림이 애석해 하였다.대승은 이황을 스승으로 섬기고 학문을 강론함에 있어 서로 뜻이 맞았는데, 이황 또한 대승을 추대하여 제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처 어묵(出處語默)을 서로서로 규계하며 닦았다. 어떤 자가 대승은 행동이 그의 지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기명언(奇明彦)은 임금을 예로써 섬기고 진퇴를 의(義)로써 하는데 어찌 지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학자(學者)들이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 불렀는데,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나중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는데, 이는 일찍이 변무(辨誣) 논의에 참여하여 주문(奏文)을 제술하였기 때문이다.대승의 자는 명언이고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나주(羅州)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진(進)과 아우 준(逡)은 모두 도학으로 세상에 이름났는데, 준은 당화(黨禍)에 연좌되어 죽고 진은 은둔하여 일생을 마치면서 문헌의 전통을 가전(家傳)하였다.
【원전】 25 집 432 면
【분류】 *인물(人物)출전 : 선조수정실록 006권 선조 5년 10월 1일 (갑인)

○前司諫院大司諫奇大升卒。大升復除大司諫, 辭遞。 會, 皇帝崩, 停遣奏請, 大升遂決意南歸。 路得臀腫, 行至古阜姻友家, 遂不起。 上聞其病重, 遣醫齎藥馳救, 下旨慰諭, 未及而卒。 司諫院啓曰: "奇大升自少有志聖賢之學, 所見超詣。 與李滉往復書尺, 請明性理之說, 發前賢所未發者。 入侍經幄, 所陳無非二帝、三王之道, 一世推以爲儒宗, 不幸有疾歸鄕, 中道而卒。 家世淸寒, 無以爲葬, 請官庀喪葬, 以示國家崇儒重道之意。" 上允之。 大升資稟卓偉, 志氣高邁。 自兒時篤於孝友, 行己以禮, 聞國恤則必哭臨, 齋素至卒哭。 及長, 博學篤志, 以古聖賢自期。 造詣高朋, 議論英發, 學者推重。 旣登第, 淸名大著, 李樑用事, 忌之落其職, 樑敗, 仕益顯。 今上初政, 首入經筵, 論思規諫, 補益弘多。 時當濁亂之後, 士氣萎薾, 以大升爲宗主, 申雪冤枉, 登庸賢俊, 朝廷淸明, 以小己卯稱之。 旣而與大臣議不合, 退居鄕里, 欲講學著述以終身, 不幸早歿, 士林惜之。 大升師事李滉, 論學相契; 滉亦推許大升, 不以弟子待之。 出處語默, 皆相勉交修。 或言: "大升行處, 不及知處。" 滉曰: "奇明彦事君以禮, 進退以義, 何謂不及知處?" 學者稱高峯先生, 有文集行于世。 其後錄光國勳, 贈吏曹判書, 以嘗參辨誣議, 撰出奏文故也。 大升字明彦, 其先幸州人, 家于羅州。 父進與弟遵, 俱以道學名世。 遵坐黨禍死, 進隱遁終身, 家傳文獻之業。

200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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