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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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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363회 작성일 21-02-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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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에는 고려초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장군으로 기언(奇彦)이 나옵니다만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었는데 이곳에서 이름을 찾았습니다.


[일리천전투연구]


1.참전국가:고려VS후백제
2.전투규모:고려(기병49800명+보병37000명=총병력86800명)
후백제(확실한 기록이 없음)
3.전투배경과 과정
935년 후백제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한다.후계자결정에 따른 불만세력들과 신검,양검,용검이 결탁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여버린것이다.이 정변으로 인해 후백제는 견훤의 친위세력,신검의 반란세력,어느쪽도 아닌 중립세력 등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한편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나주로 탈출한 후 고려로 귀부해 버린다.고려로 귀부한 견훤의 청으로 고려군은 출전하게 되어 일선(일리천)에서 대치하게 된다.이때 백제의 좌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이 견훤에 말 앞에 와서 항복한다.왕건이 효봉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이 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왕건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적의 중군으로 향하여 나아가게 하니 적이 크게 패하였다.그리하여 적장 흔강,견달,은술,금식,우봉 등을 비롯하여 3200명을 사로잡고 5700명의 목을 베었다.적들이 창끝을 돌려 저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우리군사가 적을 추격하여 황상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니 신검이 아우들과 문무백관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4.전투규모에 대한 고찰

4-1:고려군
우선 고려군에 병력을 살펴보면 병력면에서 다른전투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많은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후삼국시대의 평균전투병력이 2000~4000정도인 것을 감안했을때 총병력86800명은 굉장히 많은 수의 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일단 고려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견훤(甄萱),견권,박술희,황보금산,강유영 등은 기병10000명을 거느리고 능달,기언,한순명,흔악,영직,광세 들로 하여금 보병1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좌익으로 삼고 김철,홍유,박수경,연주,훤량 등으로 기병10000명을 거느리고 삼순,준량,영유,길강충,흔계 들로 하여금 보병10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우익으로 삼았다.왕순식,긍준,왕렴,왕예,인일, 등은 기병20000명을 이끌고 유금필,관무,관헌,등은 흑수,달고,철륵 등 외족들의 정예기병 9500명을 거느리게 하고 정순,애진 등은 보병1000명을 거느리고 종희,견훤(見萱) 등은 보병1000명을 거느리고 김극종,조간 등은 보병1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으로 삼았다. 공훤,능필,왕사윤 등은 기병300명과 여러 성에서 온 보병14000명을 거느리게 하여 삼군의 원병(전투중 위급한 곳이 있으면 지원하는 예비병력)으로 삼았다." --- <고려사>

위에 있는 고려군의 구성을 보면 먼저 왕순식이 눈에 띈다.왕순식이 참전했다는 것은 이 전투에 고려군이 총력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왜냐하면 왕순식은 강릉호족이라 태백산맥으로 인한 험한 지형으로 인해 교통이 불편하여 고려의 전투활동에 도움을 주기 힘든 점에도 불구하고 참전하였다는 것은 이 전투에 고려가 총력을 기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공훤이 이끄는 원병들이 여러 성에서 온 군사라는 기록 역시 일리천전투에 고려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그리고 유금필이 이끌었던 흑수,달고,철륵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흑수,달고,철륵은 고려북쪽지역에 있던 이민족들로 신라가 혼란한 때부터 약탈을 일삼던 부족이이다.그 약탈 정도가 상당히 심각해서 급기야는 신라의 도읍인 경주로 침공하려고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사참조).비록 이것은 고려의 방해으로 실패했을나 흑수,달고,철륵 등의 이민족세력이 경주를 침공하려 했을 정도로 심각한 약탈행동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그런데 이러한 이민족의 기병들이 일리천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더구나 적은수가 아닌 10000만에 가까운 수의 기병이 참전했다는 점이 더욱 흥미를 끈다.이러한 다수의 이민족기병이 고려군에 참가 했다는것은 고려가 이민족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려초기 기록에 이민족이 투항 혹은 정벌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렇게 고려에 귀속된 이민족들이 위에 기록을 통해 그들이 고려에 강한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기병10000명을 지원할 만큼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4-2:후백제군
일리천전투를 기록한 사서들에는 아쉽게도 후백제군의 규모에 대한 언급이 없어 확실한 규모를 알기 어렵다.심지어 전투를 지휘했던 장수들도 확실히 기록하지않아서 더욱더 규모파악이 힘들다.하지만 고려사에 있는 몇가지 기록을 통해 대략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고려사에 보면 "삼군이 일제히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했다.그리하여 흔강,견달,은술,금식,우봉 등을 비롯하여 3200명르 사로잡고 5700명의 목을 베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해 일단 적들이 적어도 10000명은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그런데 일리천전투에서는 효봉등이 이끄는 좌군(효봉의 지위가 좌장군이었다는 점을 보았을때 후백제 좌군은 효봉의 지휘를 받았다고 생각된다.이러한 주장을 뒤받침해 주는 기록으로 저들이 서로 치고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이 견훤에게 투항했다.또한 기록에 적을 추격하여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패잔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점을 살펴 보았을때 후백제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이 예측할 수 있다.


후백제군=8900명(포로및 전사자)+좌군+(패잔병)


그렇다면 전체적인 병력은 대략 얼마일까?<삼국유사>에 보면 후백제말기에 견훤이 그에 아들들에게 하는 말에 "군사가 북군에 배나 더하되 오히려 불리하여...."라는 기록이 보인다.그리고 후백제의 영역이 인구와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충청도,경상남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때 후백제의 국력은 고려와 맞먹거나 그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이러한 점을 고려해보아 일리천전투때에 후백제군의 규모는 고려와 비등했을 것이 라고 생각된다.

5.패배의 원인
다른 전투와는 다르게 일리천전투는 패배의 원인이 간단하고 확실하다.바로 내분이 있었기 때문이다.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좌군이 항복하였으니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었다.사실 고려군에 견훤(甄萱)참전했다는 것 부터가 후백제에겐 승산이 없었다.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무려 반세기에 가깝게 후백제를 다스려온 후백제의 상징이었다.그러한 견훤이 적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후백제로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었다고 생각된다.

6.일리천전투의 의의
사실 일리천전투는 그 중요성에 비해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일리천전투는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요,고대와 중세를 잇는 다리같은 사건이다.일리천전투를 마지막으로 고려로 인한 후삼국에 통일이 이루어졌다.일리천전투는 고려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신라도 도왔고 심지어 적국인 후백제인물인 견훤과 박영규등이 도왔던 ,다시 말해서 민족이 하나가 된 전투였다.이러한 일리천전투로 우리역사는 최초의 민족적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이러한 점에서 일리천전투는 그 의의를 다시금 생각하고 연구해야할 역사적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최승우>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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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의 일리천 전투기록


夏六月甄萱請曰: "老臣遠涉滄波來投聖化願仗威靈以誅賊子耳." 王初欲待時而動憐其固請乃從之. 先遣正胤武將軍述希領步騎一萬趣天安府.
秋九月王率三軍至天安府合兵進次一善郡神劒以兵逆之. 甲午隔一利川而陣王與甄萱觀兵. 以萱及大相堅權述希皇甫金山元尹康柔英等領馬軍一萬支天軍大將軍元尹能達奇言韓順明昕岳正朝英直廣世等領步軍一萬爲左綱大相金鐵洪儒朴守卿元甫連珠元尹萱良等領馬軍一萬補天軍大將軍元尹三順俊良正朝英儒吉康忠昕繼等領步軍一萬爲右綱溟州大匡王順式大相兢俊王廉王乂元甫仁一等領馬軍二萬大相庾黔弼元尹官茂官憲等領黑水達姑鐵勒諸蕃勁騎九千五百祐天軍大將軍元尹貞順正朝哀珍等領步軍一千天武軍大將軍元尹宗熙正朝見萱等領步軍一千杆天軍大將軍金克宗元甫助杆等領步軍一千爲中軍*乂{又}以大將軍大相公萱元尹能弼將軍王含允等領騎兵三百諸城軍一萬四千七百爲三軍援兵. 鼓行而前忽有白雲狀如劒戟起我師上向賊陣行. 百濟左將軍孝奉德述哀述明吉等四人見兵勢大盛免胄投戈降于甄萱馬前於是賊兵喪氣不敢動. 王勞孝奉等問神劒所在. 孝奉等曰: "在中軍左右夾擊破之必矣." 王命大將軍公萱直 中軍三軍齊進奮擊賊兵大潰. 虜將軍昕康見達殷述今式又奉等三千二百人斬五千七百餘級. 賊倒戈相攻我師追至黃山郡踰炭嶺駐營馬城. 神劒與其弟菁州城主良劒光州城主龍劒及文武官僚來降. 王大悅勞慰之命攸司虜獲百濟將士三千二百人 還本土唯昕康富達又奉見達等四十人幷妻子送至京師. 面責能奐曰: "始與良劒等謀囚君父立其子者汝也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 首不能言. 遂命誅之流良劒龍劒于眞州尋殺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罪輕二弟又且歸命特免死賜官. 於是甄萱憂 發疽數日卒于黃山佛舍. 王入百濟都城令曰: "渠魁旣已納款無犯我赤子." 存問將士量才任用軍令嚴明秋毫不犯州縣按堵老幼皆呼萬歲相慶曰: "后來其蘇."


병신 태조 19년(서기 936년) 하 6월에 견훤이 청하기를 「노신이 멀리 창파를 건너와 성화에 내투하였사오니 원컨대 왕의 위령에 의지하여 적자를 주벌하여지이다.」고 하니 왕이 처음에는 때를 기다려서 출동하려 하였으나 그가 굳이 간청함을 애처롭게 여겨 이를 청종하고 먼저 정윤(태자)무와 장군 술희를 보내어 보기 10,000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나아가게 하였다.
추 9월에 왕이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회합하고 일선군(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항거하였다. 갑오에 일리천(성주 가리현)을 격하여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관병을 하고 견훤과 대상 견권 술희 황보금산 원윤 강유영 등으로 마차 10,000을 거느리게 하고 지천군 대장군 원윤 능달 기언 한순명 흔악과 정조 영직 광세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을 삼고 대상 김철 홍유 박수경과 원보 연주와 원윤이 훤량 등으로 마군 10,000을 거느리게 하고 보천대장군 원윤 삼순 준량과 정조 영유 길강충 흔계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우강을 삼고 명주대광 왕순식과 대상 긍준 왕렴 왕예와 원보 인일 등으로 마군 20,000을 거느리게 하고 대상 유검필과 원윤 관무 관헌 등으로 흑수 달고철륵 제번의 날쌘 기병 9,500을 거느리게 하고 우천군대장군 원윤 정순과 정조 애진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고 천무군대장군 원윤 종희와 정조 견훤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며 간천군대장군 김극종과 원보 조간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을 삼고 또 대장군 대상 공훤과 원윤 능필과 장군 왕함윤 등으로 기병 300과 제성의 군사 14,700을 거느리게 하여 삼군의 원병을 삼아 전고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같은 형상을 한 백운이 우리 군사의 두상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하여 날아갔다.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인이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마전에 강복하여 오는지라 이에 적병은 사기를 잃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거늘 왕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의 소재를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중군에 있사오니 좌우로 협격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왕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바로 중군을 두들기게 하고 삼군이 일제히 전진하여 분격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장군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 등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급을 참살하매 적병이 창을 거꾸로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치는 지라 우리 군사는 추격하여 황산군(연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에 진주하였다. 신검이 그의 아우 청주(진주)성주 양검과 광주 성주 용검 및 문무의 관료와 함께 나와 강복하거늘 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사로잡은 백제의 장사 3,200인을 모두 본토에 돌려 보냈으나 다만 흔강 부달 우봉 견달 등 40인만은 그 처자와 아울러 서울에 보내고 능환을 면책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모의하여 군부를 가두고 그의 아들을 세운 자는 너였다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고하니 능환이 머리를 수그리고 말을 못하는 지라 드디어 명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양검과 용검을 진주에 귀양보냈다가 뒤 이어 그들을 죽였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타인에게 협박을 당하여 한 짓이므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벼우며 또 귀순하였으므로 특히 죽음을 면제하여 관작을 사하였다. 이에 견훤은 근심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연산)의 절에서 졸하였다. 왕이 백제 도성에 들어가 영을 내려 「거괴가 이미 항복하여 왔으니 나의 적자(백성)를 범하지 말라」고 하고 장사들을 존문하며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고 군령을 엄명히 하여 추호도 범함이 없으니 주 현이 안도하여 늙은이나 어린이가 다 만세를 부르며 서로 기뻐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오시니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달에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위봉루에 나아가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조하를 받았다. 왕이 이미 삼한을 정하고 신자된 자들로 하여금 예절을 밝게 하고자 하여 드디어 손수 정계 1권과 계백요서 8편을 제술하여 이를 중외에 반포하였다. 동 12월 정유에 대광 배현경이 졸하였다. 이 해에 광흥 현성 미륵 내천왕 등의 사찰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창건하였다.

200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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