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후예(알송달송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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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퍼온겁니다. 내용이 알듯 말듯 어렵군요
이하의 글은 1993년 계간 한배달에 당시 편집주간으로 계셨던 송동건 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문맥을 재편함을 밝힙니다. 논문의 내용은 그대로 韓,漢文을 그대로 적되 동형의 자가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자字 또는 훈訓을 달고 필자의 주석은 따로 정리 하여 올릴까 합니다.
논문인용1
(1) 주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진(晉)과 왕씨(王氏)
[唐書.宰相世系表.당서.재상세계표]왕씨 서序에 의하면
"王氏(왕씨)는 出自姬姓(출자희성)이다.
周靈王太子晉주영왕태자진이 直諫직간하다 廢庶人폐서인 이 되더니,
其子기자인 宗敬종경이 사도司徒가 되어 때에 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부르므로 그로 인因하여 王氏가 되었다."
이 태자太子 진晉의 후손後孫인 왕씨王氏는 후後에 태원왕씨太原王氏와 낭사왕씨琅邪王氏로 크게 나뉘지만, 정사正史나 비문碑文이 한결같이 태자太子 진晉의 후後임을 항상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태자太子 진晉을 왕씨王氏의 시조始祖라고 언급한 것은 한漢의 왕부王符가 [잠부론潛夫論] 지씨성편志氏姓篇에서 밝힌 것이 처음이다.
태자 진에 관한 사항은 [일주서逸周書]와 [국어,주어國語,周語]의 내용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즉, 곡낙수穀낙水가 왕궁王宮을 훼손毁損할 것 같아 왕이 수로水路를 차단遮斷코저 함에 태자가 그 불가不可함을 설說한 것과 진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을 보내 태자의 인물됨을 관찰觀察케한 일화逸話 들이다.
태자가 요절妖折했다는 얘기를 들은 공자孔子가 "애석哀惜한지고, 오군吾君을 살해殺害한 거야!"라고 했으며 스스로 갈 날을 예기豫期했다고 세상에서 그를 "왕자교선王子喬仙"으로 칭稱했다는 것이다.
"기其 후사後嗣 는 주왕조周王朝의 난難을 피避하여 진晉으로 가 평양平陽에 가家를 이루었다. 전씨田氏, 왕씨王氏가 그의 후後다"
이 왕부王符의 태자 진에 관한 설說은 왕씨 시조에 관한 원형原形이며 가장 초기初期의 소설所說이면서 극히 근거根據있는 타당성妥當性과 확실성確實性에 기초基礎한 것으로 간고看攷된다.
이 설說을 승계承繼하여 [당서唐書]와 접합점接合點을 갖게 되는것이 송宋의 나비羅泌가 찬撰하고 그 아들이 주註한[노사후기路史後紀]의 입장이다.
영왕태자靈王太子의 이름을 "초고超古"라 하고 간諫하다가 폐廢하여 18세에 빈賓했으니 이가 "진晉"이며, 자子 종경宗敬이 사도司徒가 되어 호號를 "왕자王子"라 했으며 평양平陽에 가家를 이루었다. 그 후손이 "전씨田氏, 왕씨王氏, 이씨李氏,척왕씨拓王氏(척지씨拓至氏는 오誤), 가빈씨可頻氏, 을속고씨乙速孤氏 등이다.
"왕씨王氏는 낭사琅邪나 태현太原 기현祁縣의 제방諸房이 모두 태자太子 진晉에서 유래한다.
[주서周書]의 왕병王秉과 왕흥王興은 나란히 척왕씨拓王氏로 사성賜姓받았다.
왕웅王雄은 태원인太原人으로 가빈씨可頻氏를 사賜한다.
태원왕 현顯은 후위後魏가 을속고乙速孤를 사성賜姓하여 예천인醴泉人이 된다.
"북조北朝의 복성複姓인 척왕씨拓王氏와 가빈씨可頻氏, 그리고 삼자성三字姓인 을속고乙速孤는 모두 "왕씨王氏"가 본성本姓임을 알 수 있다. 현행現行의 [주서]에는 척왕씨로 사성받는 왕병, 왕흥은 없다.
[광운廣韻]19탁척鐸拓에도 "우로복성又虜複姓.[주서]왕병,왕흥. 병사성竝賜姓 척왕씨拓王氏"라 있다.
[북조호성고北朝胡姓考]에서 요미원姚薇元은 "안按[주서]왕맹전운王盟傳云..
"왕맹王盟, 기선낙랑인其先樂浪人. 육세조六世祖 파波,전연태재前燕太宰. 조祖 진珍,위魏 황문시랑黃門侍郞, 증贈 병주자사낙랑공 幷州刺史樂浪公. 부父 파罷(+火), 복파장군이량가자진무천伏波將軍以良家子鎭武川. 인가오因家오. 대통중大統中(535~551)사성賜姓 척왕씨.자子 려자추흥勵字醜興. 거차據此, 가지可知"
[광운廣韻] 왕병,왕흥.내왕맹乃旺盟,왕추흥지위王醜興之爲(+言)"라 한다.
말하자면 주서周書의 왕맹,왕려(字추흥)이 와전訛傳되어 [광운]에 왕병,왕흥으로 표기表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비羅泌도 [광운]과 똑같은 이름이 [주서]에 있다고 했으므로 오히려 주서를 후인後人이 개찬改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쨋건 간에[주서]에서 왕맹이 척왕씨로 사성 받은 것은 조청작난趙靑雀亂이 평정平定된 후 이므로 대통大統4년四年(538)팔八~구월九月이다.
청작靑雀이 작난作亂할 때는 위魏가 동벌東伐할 때이다. 이때 주태조周太祖인 우문태宇文泰가 왕사정王思政을 항농恒農에, 왕맹王盟과 주혜달周惠達은 위북渭北에, 그리고 왕파王罷(+火)는 하동河東에 각각 진鎭하고 있게 했다. 여기의 왕파가 왕맹의 부父라는 말은 없다. 어쨋든 왕맹은 명덕황후왕씨明德皇后王氏의 형兄이다. 즉, 덕황제우문굉德皇帝宇文肱의 후後며 태조 우문태의 모母가 낙랑왕씨樂浪王氏이며 그 부父인 왕파는 태조의 외삼촌인 셈이다.
그리고 이 낙랑왕씨는 또한 주영왕周靈王태자太子진晉의 후後인 왕씨王氏이면서 첟왕씨拓王氏로 사성賜姓 받은 것이다.
(1)인용 끝.
이상의 서문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춘추전국시 주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란 인물로 인因해 파생된 왕씨王氏의 계보를 서두序頭에 두고, 이 왕자(폐서인이 되고 말았지만,) 진晉의 후後로 얼마나 많은 성姓이 계출系出되고 또 그 후손들이 지나의 역사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차차 짚어볼 것 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난亂을 피하여 평양平陽에서 가家를 이룬 것이 시초이고 후대後代의 본本을 여지 없이 낙랑樂浪에 두는 것이나,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언급 되지는 않았지만 이 "진晉"이란 인물이 결국, 조선으로 망명한 상商나라 주紂왕의 숙부淑父 기자箕子를 시조로 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상고사에 있어 기자箕子의 존재여부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지만, 우리측 사서의 곳곳에 기자箕子를 언급한 부분이 있고(물론, 차이나측 사료를 인용한 것이겠지만) 차이나측에서도 조선과 연관해서는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존재 일뿐 아니라, 공맹孔孟의 사상도 이에게 영향을 받음이 적지 않다 할 정도로 上古의 聖人으로 추앙 받는 존재라서, 지금껏 상고사학 분야에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위의 평양平陽이란 지명이 낙랑고적樂浪古跡을 발굴 했다는 그 평양坪壤의 동칭同稱인지, 또는 일반적 범칭凡稱으로 쓰여진 "평양"의 하나 이던지 간에 "평양" 하면 늘 상 따라붙는 "낙랑"이라는 곳이, 여지없이 곳곳에 상응하여 등장한다는 사실 입니다.
차이나 사가史家의 골수骨首에 "낙랑"하면 "낙랑 왕씨"를 떠올리는 만큼 누대累代로 낙랑에 터를 잡아 살아온 명문 귀족으로써, 또 전통적 황실의 외척으로써 어쩌면 낙랑 하면 평양이나 "신라"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우리들도 뒤에 나올 말이지만 전후한前後漢 교체기에 "신新"을 세운 이상가理想家 왕망王莽의 망민亡民이 결국 신라(또는,가야)의 낙랑땅으로 회귀廻歸할수 밖에 없는 숙명적 반본反本이란 말일까요?
(2) "기자후예의 왕씨"
필자 註: 참고 하실 만한 용어를 정리 해봤습니다.
*희성姬姓: 성姓이란 것은 상형像形(금문해석金文解析)으로 풀어 보면 "계집으로부터 생겨난.." 즉 성姓이란 모계母系로 이어졌던 것을 시초始初로 한다. 후後에 씨족간의 영역개념이 발생됨으로써 상호간 생존방법으로 대.소규모의 조직적 전쟁(전투)이 반복 되었을 테고 이로 인해 전쟁의 주도권을 가진 남성이 가장家長의 위치를 차지 했을 테고 차츰 씨족의 규모가 확대(지속적인 정복을 통한)됨으로 이러한 사회적 변혁이 급속히 확산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중토中土에 장가들어 이룬 것이 "부성父姓"의 시작이니 원래 황제의 성姓은 제齊(산동)의 (유웅有雄)웅씨熊氏로 계집 성姓이다. 이는 불서갑沸西甲 하백녀河伯女 웅씨熊氏의 후예後嗣를 이은 웅씨熊氏의 비왕卑王으로써 섭정을 경험한 왕검王劍(임검壬劍)이 아사달을 이루며 부계父系로 이어지는 일대변혁과 비교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제웅齊雄의 신앙도 암콤을 토뎀으로 하는 것은 주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흔히 "희성姬姓"이라 함은 황제의 변혁 이전의 계집 성姓을 그대로 유지해서 쓰던 고성古姓을 이름이 가可할 것이다. 주로 북방제족(유목민-중국인들이 호인胡人이라고 하는),신화상의 시조들의 성姓이 희성姬姓이다.
북위北魏의 묘지중에 원원평처왕씨元願平妻王氏(영평永平2년.509) 왕정王禎(연창延昌4년,515) 왕기王基(정광正光4년,523) 왕서王舒(영안永安3년,530)의 네 묘지는 모두 "낙랑수성인樂浪遂城人"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조만리趙萬里,<묘지집석墓誌集釋>)
다시 말해 모두가 "낙랑樂浪왕씨王氏"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모두가 "연무읍공파燕武邑公波"의 6세손六世孫이다.
[주서]의 왕맹王盟과 같은 "낙랑왕씨"일뿐만 아니라 육세조가 역시 전연前燕의 왕파王波이니 배행輩行도 같은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묘지명은 그들이 바로 "기자의 묘예苗裔" 라는 것 이다.
북위종실北魏宗室의 왕비王妃인 왕씨王氏의 묘지는
"부인夫人,왕씨王氏. 낙랑수성인야樂浪遂城人也. 연의동삼사무읍공파지육세손燕儀同三司武邑公波之六世孫.
성조유영이주자사광양정후도민지제삼녀聖祖幽營二州刺史廣陽靖后道岷之第三女.
익제이주자사연군강공창려한기린지외손,翼齊二州刺史燕郡康公昌黎韓麒麟之外孫"이라고 시작하여, 기사왈其辭曰에는
"낙랑명방樂浪名邦 왕씨명종王氏名宗"이라 했다.
"위고항주치중진양남왕부군묘지명魏故恒州治中晉陽男王府君墓誌銘"은 "군휘정君諱禎, 자종경子宗慶. 낙랑수성인야樂浪遂城人也. 연무읍공파지육세손燕武邑公波之六世孫. 고조예반高祖禮班, 산기상시평서장군급사황문시랑진양후散騎常時平西將軍給事黃門侍郞晉陽侯, 증조정국曾祖定國. 성조고부급사중하내태수회평남聖朝庫部給事中河內太守懷平男. 조당성祖唐成, 광무장군동궁시랑합비자廣武將軍東宮侍朗合肥子. 부광조父光祖, 영원장군서주장사회양태수사주중정진양남寧遠將軍徐州長史淮陽太守司州中正晉陽男."
이라고 그 선세先世를 열거한 후,
"은유왕인殷有王人, 주방구주周訪九疇. 지족왕가只足王家, 적위선후籍胃鮮侯" 이라고 그가 기자의 후예라는걸 밝혔다.
은유왕인殷有王人은 箕子를 지칭하며, 주무왕周武王이 그를 방문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기자가 설說한 것을 말하고 있다.
처사處士라고만 일컫는 왕기王基는 자字가 홍업洪業으로 낙랑수성인樂浪遂城人이다.
"기선출자유은其先出自有殷, 주무왕극상周武王剋上, 봉기자어조선封箕者於朝鮮, 자손인이씨언子孫因而氏焉. 육세조파六世祖波, 연의동삼사무읍공燕儀同三司武邑公. 고조반高祖班, 산기상시평서장군급사황문시랑진양후散騎常時平西將軍給事黃門侍郞晉陽侯. 증조정국曾祖定國, 성조고부급사관군장군병주자사박평남聖朝庫部給事冠軍將軍幷州刺史博平男. 조당성祖唐成, 광무장군동궁시랑합비자廣武將軍東宮侍朗合肥子. 부광조父光祖, 영원장군서주장사회양태수사주중정진양남寧遠將軍徐州長史淮陽太守司州中正晉陽男."
이니 왕기王基는 왕정王禎과 형제兄弟이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기자箕子"란 이름이 쓰이고 있다. 특히 유의할 것은 "자손이 인因하여 이씨언而氏焉"이란 표현이다.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권4의"이작위씨以爵位氏(작爵을 씨氏로 한 경우)"의 "왕씨王氏"하下 에는 "천자지예야天子之裔也"라 한다.
환언換言하면 "왕씨"는 "천자의 후예"들이며 "왕王의 작爵"을 가졌기 때문에 "왕씨王氏"인 것이다. 이점은 왕정지王禎誌가 "은유왕인殷有王人"이라 한 것과 "지족왕가只足王家"라 한 것과 결부시켜 고려되어야 한다.
작爵을 씨氏로 하는 예에서 천자지예天子之裔가 왕씨王氏이며, 기자가 조선에 봉을 받아 "인因하여 기씨箕氏"로 했음은 箕子가 처음부터 조선朝鮮의 왕王이었음을 뜻하며 그래서 지족왕가只族王家인 것이다
<인용끝>
우리가 특히 눈여겨 봐야 할 곳은 묘지에서 드러난 낙랑왕씨 들의 봉지封地들입니다.
대표적인 지명은, 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가 "낙랑수성"이고 그 다음이 연燕의 "무읍武邑" 그 후 자손의 봉지들인 유주幽州, 영주營州와 광양廣陽,항주恒州의 진양晉陽, 하내河內의 회평懷平, 합비合肥, 서주徐州, 장사長史, 회양淮陽, 병주幷州의 박평博平(다만, 증조부 정국定國의 봉지가 상,하로 다르게 나왔는데, 하내의 회평이 맞는 건지, 병주의 박평이 맞는 건지, 아니면 겸직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의 지명이 누대로 한곳에 고정 되어 있진 않지만, 서경書經에서 나타나는 상기 지명의 통설상 유,영주는 현 북경주변->광양, 항주는 진도晉都가 있던 곳 동 또는 북이므로 진대晉代라면 태원太原근방-->진양(晉陽)
하내(河內)는 황하黃河와 회수淮水사이, 이하 회평, 합비, 서주, 장사, 회양 등의 지명은 양자강을 따라,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호남성으로 이어져 대륙의 하남지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봉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 이지만, 우선 이들 지역이 역대 낙랑지(樂浪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에서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부분 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상 미지迷地로 남아있는 낙랑의 정체나 위치비정에 상당한 참고가 될 것임을 천명 합니다. 즉, 상기 지명들이 중원의 변두리가 아닌 중원 깊숙한 전략의 요충지로서 자리한 곳 이기 때문에 선뜻 삼국사기의 "낙랑"과 연결하는데 주저하지만, 지나사서를 회고해 보건데 특히, 신라나 "왜"의 경우 "낙랑군왕"의 봉작을 가져간 것이 자주 보이니 심고深考하여 생각할 문제 인 듯 하기도 하지만, 전前,후한後漢 교체기의 "신新"을 세운 휴도왕, 김일제의 후손인 "왕망王莽(선비계라 알려진..)"도 위 "낙랑왕씨"라는 것인데 이는 신라 초기부터 유력 호족으로서 신라의 지도층을 형성했던 "낙랑최씨"와 함께 이 "왕씨-(신나라의 멸망후 왕조의 종실이 피난하여 후세에 그 조상 '소호금천'의 직계인 임나 김씨로 성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의 연관성을 생각 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퍼즐을 풀어가듯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비문의 분석을 통해 역사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 입니다.
기자箕子가 주무왕의 봉함을 받아 조선을 교화 했든, 아니면 단군세기의 번한세가 말기에 기씨箕氏가 번한으로 귀화하여, 그 후손이 군왕이 되어 기준으로까지 이어졌던 간에 우리 상고사의 가장 민감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는 것으로, 번한의 구도舊都가 왕검성이요, 이가 평양이라 하니 또한 그곳이 "낙랑" 이 틀림 없을진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연결 되는 역사의 역정이라면, 험독의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요동성의 평양이 아니라, 난하의 평양이 아니라,주영왕 태자진의 평양(太原 또는 平陽)이 될 수 밖에 없음은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쨋던 위만에 쫒겨 남한南韓땅으로 옮긴 기준箕準의 종당從黨들은 나중에 청주靑州(산동山東의..) 한씨韓氏의 조상이 된다는 일설에 의거 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건너갔던 한수漢水란 도저히 한강이 될수 없는 중요한 힌트가 되는 것이 연무읍공 "왕파"의 5세손인 광양정후"왕도민(북위의 국구國舅가 됨)"이 "익제翼齊(산동과 강소일대-특히, 제주齊州의 성도省都는 청도靑都 그 일대가 청주靑州가 됩니다.)이주자사연군강공창려二州刺史燕郡康公昌黎(역시 낙랑군치소로 이름난 곳입니다.)한기린韓麒麟(문제의 청주 "한韓"씨 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낙랑군왕은 아닙니다.)"의 사위가 됨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낙랑왕씨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종씨從氏도 짚어봐야 할 일이지만, 이 왕씨와 연관되는 우리에게 낯익은 많은 성姓(경주 최崔, 청주 한韓, 전주 이李)씨들도 되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2003.01.19
이하의 글은 1993년 계간 한배달에 당시 편집주간으로 계셨던 송동건 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문맥을 재편함을 밝힙니다. 논문의 내용은 그대로 韓,漢文을 그대로 적되 동형의 자가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자字 또는 훈訓을 달고 필자의 주석은 따로 정리 하여 올릴까 합니다.
논문인용1
(1) 주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진(晉)과 왕씨(王氏)
[唐書.宰相世系表.당서.재상세계표]왕씨 서序에 의하면
"王氏(왕씨)는 出自姬姓(출자희성)이다.
周靈王太子晉주영왕태자진이 直諫직간하다 廢庶人폐서인 이 되더니,
其子기자인 宗敬종경이 사도司徒가 되어 때에 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부르므로 그로 인因하여 王氏가 되었다."
이 태자太子 진晉의 후손後孫인 왕씨王氏는 후後에 태원왕씨太原王氏와 낭사왕씨琅邪王氏로 크게 나뉘지만, 정사正史나 비문碑文이 한결같이 태자太子 진晉의 후後임을 항상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태자太子 진晉을 왕씨王氏의 시조始祖라고 언급한 것은 한漢의 왕부王符가 [잠부론潛夫論] 지씨성편志氏姓篇에서 밝힌 것이 처음이다.
태자 진에 관한 사항은 [일주서逸周書]와 [국어,주어國語,周語]의 내용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즉, 곡낙수穀낙水가 왕궁王宮을 훼손毁損할 것 같아 왕이 수로水路를 차단遮斷코저 함에 태자가 그 불가不可함을 설說한 것과 진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을 보내 태자의 인물됨을 관찰觀察케한 일화逸話 들이다.
태자가 요절妖折했다는 얘기를 들은 공자孔子가 "애석哀惜한지고, 오군吾君을 살해殺害한 거야!"라고 했으며 스스로 갈 날을 예기豫期했다고 세상에서 그를 "왕자교선王子喬仙"으로 칭稱했다는 것이다.
"기其 후사後嗣 는 주왕조周王朝의 난難을 피避하여 진晉으로 가 평양平陽에 가家를 이루었다. 전씨田氏, 왕씨王氏가 그의 후後다"
이 왕부王符의 태자 진에 관한 설說은 왕씨 시조에 관한 원형原形이며 가장 초기初期의 소설所說이면서 극히 근거根據있는 타당성妥當性과 확실성確實性에 기초基礎한 것으로 간고看攷된다.
이 설說을 승계承繼하여 [당서唐書]와 접합점接合點을 갖게 되는것이 송宋의 나비羅泌가 찬撰하고 그 아들이 주註한[노사후기路史後紀]의 입장이다.
영왕태자靈王太子의 이름을 "초고超古"라 하고 간諫하다가 폐廢하여 18세에 빈賓했으니 이가 "진晉"이며, 자子 종경宗敬이 사도司徒가 되어 호號를 "왕자王子"라 했으며 평양平陽에 가家를 이루었다. 그 후손이 "전씨田氏, 왕씨王氏, 이씨李氏,척왕씨拓王氏(척지씨拓至氏는 오誤), 가빈씨可頻氏, 을속고씨乙速孤氏 등이다.
"왕씨王氏는 낭사琅邪나 태현太原 기현祁縣의 제방諸房이 모두 태자太子 진晉에서 유래한다.
[주서周書]의 왕병王秉과 왕흥王興은 나란히 척왕씨拓王氏로 사성賜姓받았다.
왕웅王雄은 태원인太原人으로 가빈씨可頻氏를 사賜한다.
태원왕 현顯은 후위後魏가 을속고乙速孤를 사성賜姓하여 예천인醴泉人이 된다.
"북조北朝의 복성複姓인 척왕씨拓王氏와 가빈씨可頻氏, 그리고 삼자성三字姓인 을속고乙速孤는 모두 "왕씨王氏"가 본성本姓임을 알 수 있다. 현행現行의 [주서]에는 척왕씨로 사성받는 왕병, 왕흥은 없다.
[광운廣韻]19탁척鐸拓에도 "우로복성又虜複姓.[주서]왕병,왕흥. 병사성竝賜姓 척왕씨拓王氏"라 있다.
[북조호성고北朝胡姓考]에서 요미원姚薇元은 "안按[주서]왕맹전운王盟傳云..
"왕맹王盟, 기선낙랑인其先樂浪人. 육세조六世祖 파波,전연태재前燕太宰. 조祖 진珍,위魏 황문시랑黃門侍郞, 증贈 병주자사낙랑공 幷州刺史樂浪公. 부父 파罷(+火), 복파장군이량가자진무천伏波將軍以良家子鎭武川. 인가오因家오. 대통중大統中(535~551)사성賜姓 척왕씨.자子 려자추흥勵字醜興. 거차據此, 가지可知"
[광운廣韻] 왕병,왕흥.내왕맹乃旺盟,왕추흥지위王醜興之爲(+言)"라 한다.
말하자면 주서周書의 왕맹,왕려(字추흥)이 와전訛傳되어 [광운]에 왕병,왕흥으로 표기表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비羅泌도 [광운]과 똑같은 이름이 [주서]에 있다고 했으므로 오히려 주서를 후인後人이 개찬改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쨋건 간에[주서]에서 왕맹이 척왕씨로 사성 받은 것은 조청작난趙靑雀亂이 평정平定된 후 이므로 대통大統4년四年(538)팔八~구월九月이다.
청작靑雀이 작난作亂할 때는 위魏가 동벌東伐할 때이다. 이때 주태조周太祖인 우문태宇文泰가 왕사정王思政을 항농恒農에, 왕맹王盟과 주혜달周惠達은 위북渭北에, 그리고 왕파王罷(+火)는 하동河東에 각각 진鎭하고 있게 했다. 여기의 왕파가 왕맹의 부父라는 말은 없다. 어쨋든 왕맹은 명덕황후왕씨明德皇后王氏의 형兄이다. 즉, 덕황제우문굉德皇帝宇文肱의 후後며 태조 우문태의 모母가 낙랑왕씨樂浪王氏이며 그 부父인 왕파는 태조의 외삼촌인 셈이다.
그리고 이 낙랑왕씨는 또한 주영왕周靈王태자太子진晉의 후後인 왕씨王氏이면서 첟왕씨拓王氏로 사성賜姓 받은 것이다.
(1)인용 끝.
이상의 서문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춘추전국시 주영왕周靈王의 태자 "진晉"이란 인물로 인因해 파생된 왕씨王氏의 계보를 서두序頭에 두고, 이 왕자(폐서인이 되고 말았지만,) 진晉의 후後로 얼마나 많은 성姓이 계출系出되고 또 그 후손들이 지나의 역사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차차 짚어볼 것 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난亂을 피하여 평양平陽에서 가家를 이룬 것이 시초이고 후대後代의 본本을 여지 없이 낙랑樂浪에 두는 것이나, 더욱 놀라운 것은 아직 언급 되지는 않았지만 이 "진晉"이란 인물이 결국, 조선으로 망명한 상商나라 주紂왕의 숙부淑父 기자箕子를 시조로 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상고사에 있어 기자箕子의 존재여부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지만, 우리측 사서의 곳곳에 기자箕子를 언급한 부분이 있고(물론, 차이나측 사료를 인용한 것이겠지만) 차이나측에서도 조선과 연관해서는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존재 일뿐 아니라, 공맹孔孟의 사상도 이에게 영향을 받음이 적지 않다 할 정도로 上古의 聖人으로 추앙 받는 존재라서, 지금껏 상고사학 분야에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위의 평양平陽이란 지명이 낙랑고적樂浪古跡을 발굴 했다는 그 평양坪壤의 동칭同稱인지, 또는 일반적 범칭凡稱으로 쓰여진 "평양"의 하나 이던지 간에 "평양" 하면 늘 상 따라붙는 "낙랑"이라는 곳이, 여지없이 곳곳에 상응하여 등장한다는 사실 입니다.
차이나 사가史家의 골수骨首에 "낙랑"하면 "낙랑 왕씨"를 떠올리는 만큼 누대累代로 낙랑에 터를 잡아 살아온 명문 귀족으로써, 또 전통적 황실의 외척으로써 어쩌면 낙랑 하면 평양이나 "신라"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우리들도 뒤에 나올 말이지만 전후한前後漢 교체기에 "신新"을 세운 이상가理想家 왕망王莽의 망민亡民이 결국 신라(또는,가야)의 낙랑땅으로 회귀廻歸할수 밖에 없는 숙명적 반본反本이란 말일까요?
(2) "기자후예의 왕씨"
필자 註: 참고 하실 만한 용어를 정리 해봤습니다.
*희성姬姓: 성姓이란 것은 상형像形(금문해석金文解析)으로 풀어 보면 "계집으로부터 생겨난.." 즉 성姓이란 모계母系로 이어졌던 것을 시초始初로 한다. 후後에 씨족간의 영역개념이 발생됨으로써 상호간 생존방법으로 대.소규모의 조직적 전쟁(전투)이 반복 되었을 테고 이로 인해 전쟁의 주도권을 가진 남성이 가장家長의 위치를 차지 했을 테고 차츰 씨족의 규모가 확대(지속적인 정복을 통한)됨으로 이러한 사회적 변혁이 급속히 확산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중토中土에 장가들어 이룬 것이 "부성父姓"의 시작이니 원래 황제의 성姓은 제齊(산동)의 (유웅有雄)웅씨熊氏로 계집 성姓이다. 이는 불서갑沸西甲 하백녀河伯女 웅씨熊氏의 후예後嗣를 이은 웅씨熊氏의 비왕卑王으로써 섭정을 경험한 왕검王劍(임검壬劍)이 아사달을 이루며 부계父系로 이어지는 일대변혁과 비교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제웅齊雄의 신앙도 암콤을 토뎀으로 하는 것은 주지 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흔히 "희성姬姓"이라 함은 황제의 변혁 이전의 계집 성姓을 그대로 유지해서 쓰던 고성古姓을 이름이 가可할 것이다. 주로 북방제족(유목민-중국인들이 호인胡人이라고 하는),신화상의 시조들의 성姓이 희성姬姓이다.
북위北魏의 묘지중에 원원평처왕씨元願平妻王氏(영평永平2년.509) 왕정王禎(연창延昌4년,515) 왕기王基(정광正光4년,523) 왕서王舒(영안永安3년,530)의 네 묘지는 모두 "낙랑수성인樂浪遂城人"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조만리趙萬里,<묘지집석墓誌集釋>)
다시 말해 모두가 "낙랑樂浪왕씨王氏"들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모두가 "연무읍공파燕武邑公波"의 6세손六世孫이다.
[주서]의 왕맹王盟과 같은 "낙랑왕씨"일뿐만 아니라 육세조가 역시 전연前燕의 왕파王波이니 배행輩行도 같은 셈이다. 그런데 이들의 묘지명은 그들이 바로 "기자의 묘예苗裔" 라는 것 이다.
북위종실北魏宗室의 왕비王妃인 왕씨王氏의 묘지는
"부인夫人,왕씨王氏. 낙랑수성인야樂浪遂城人也. 연의동삼사무읍공파지육세손燕儀同三司武邑公波之六世孫.
성조유영이주자사광양정후도민지제삼녀聖祖幽營二州刺史廣陽靖后道岷之第三女.
익제이주자사연군강공창려한기린지외손,翼齊二州刺史燕郡康公昌黎韓麒麟之外孫"이라고 시작하여, 기사왈其辭曰에는
"낙랑명방樂浪名邦 왕씨명종王氏名宗"이라 했다.
"위고항주치중진양남왕부군묘지명魏故恒州治中晉陽男王府君墓誌銘"은 "군휘정君諱禎, 자종경子宗慶. 낙랑수성인야樂浪遂城人也. 연무읍공파지육세손燕武邑公波之六世孫. 고조예반高祖禮班, 산기상시평서장군급사황문시랑진양후散騎常時平西將軍給事黃門侍郞晉陽侯, 증조정국曾祖定國. 성조고부급사중하내태수회평남聖朝庫部給事中河內太守懷平男. 조당성祖唐成, 광무장군동궁시랑합비자廣武將軍東宮侍朗合肥子. 부광조父光祖, 영원장군서주장사회양태수사주중정진양남寧遠將軍徐州長史淮陽太守司州中正晉陽男."
이라고 그 선세先世를 열거한 후,
"은유왕인殷有王人, 주방구주周訪九疇. 지족왕가只足王家, 적위선후籍胃鮮侯" 이라고 그가 기자의 후예라는걸 밝혔다.
은유왕인殷有王人은 箕子를 지칭하며, 주무왕周武王이 그를 방문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기자가 설說한 것을 말하고 있다.
처사處士라고만 일컫는 왕기王基는 자字가 홍업洪業으로 낙랑수성인樂浪遂城人이다.
"기선출자유은其先出自有殷, 주무왕극상周武王剋上, 봉기자어조선封箕者於朝鮮, 자손인이씨언子孫因而氏焉. 육세조파六世祖波, 연의동삼사무읍공燕儀同三司武邑公. 고조반高祖班, 산기상시평서장군급사황문시랑진양후散騎常時平西將軍給事黃門侍郞晉陽侯. 증조정국曾祖定國, 성조고부급사관군장군병주자사박평남聖朝庫部給事冠軍將軍幷州刺史博平男. 조당성祖唐成, 광무장군동궁시랑합비자廣武將軍東宮侍朗合肥子. 부광조父光祖, 영원장군서주장사회양태수사주중정진양남寧遠將軍徐州長史淮陽太守司州中正晉陽男."
이니 왕기王基는 왕정王禎과 형제兄弟이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기자箕子"란 이름이 쓰이고 있다. 특히 유의할 것은 "자손이 인因하여 이씨언而氏焉"이란 표현이다.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권4의"이작위씨以爵位氏(작爵을 씨氏로 한 경우)"의 "왕씨王氏"하下 에는 "천자지예야天子之裔也"라 한다.
환언換言하면 "왕씨"는 "천자의 후예"들이며 "왕王의 작爵"을 가졌기 때문에 "왕씨王氏"인 것이다. 이점은 왕정지王禎誌가 "은유왕인殷有王人"이라 한 것과 "지족왕가只足王家"라 한 것과 결부시켜 고려되어야 한다.
작爵을 씨氏로 하는 예에서 천자지예天子之裔가 왕씨王氏이며, 기자가 조선에 봉을 받아 "인因하여 기씨箕氏"로 했음은 箕子가 처음부터 조선朝鮮의 왕王이었음을 뜻하며 그래서 지족왕가只族王家인 것이다
<인용끝>
우리가 특히 눈여겨 봐야 할 곳은 묘지에서 드러난 낙랑왕씨 들의 봉지封地들입니다.
대표적인 지명은, 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가 "낙랑수성"이고 그 다음이 연燕의 "무읍武邑" 그 후 자손의 봉지들인 유주幽州, 영주營州와 광양廣陽,항주恒州의 진양晉陽, 하내河內의 회평懷平, 합비合肥, 서주徐州, 장사長史, 회양淮陽, 병주幷州의 박평博平(다만, 증조부 정국定國의 봉지가 상,하로 다르게 나왔는데, 하내의 회평이 맞는 건지, 병주의 박평이 맞는 건지, 아니면 겸직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의 지명이 누대로 한곳에 고정 되어 있진 않지만, 서경書經에서 나타나는 상기 지명의 통설상 유,영주는 현 북경주변->광양, 항주는 진도晉都가 있던 곳 동 또는 북이므로 진대晉代라면 태원太原근방-->진양(晉陽)
하내(河內)는 황하黃河와 회수淮水사이, 이하 회평, 합비, 서주, 장사, 회양 등의 지명은 양자강을 따라,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호남성으로 이어져 대륙의 하남지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봉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 이지만, 우선 이들 지역이 역대 낙랑지(樂浪地)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에서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부분 이라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상 미지迷地로 남아있는 낙랑의 정체나 위치비정에 상당한 참고가 될 것임을 천명 합니다. 즉, 상기 지명들이 중원의 변두리가 아닌 중원 깊숙한 전략의 요충지로서 자리한 곳 이기 때문에 선뜻 삼국사기의 "낙랑"과 연결하는데 주저하지만, 지나사서를 회고해 보건데 특히, 신라나 "왜"의 경우 "낙랑군왕"의 봉작을 가져간 것이 자주 보이니 심고深考하여 생각할 문제 인 듯 하기도 하지만, 전前,후한後漢 교체기의 "신新"을 세운 휴도왕, 김일제의 후손인 "왕망王莽(선비계라 알려진..)"도 위 "낙랑왕씨"라는 것인데 이는 신라 초기부터 유력 호족으로서 신라의 지도층을 형성했던 "낙랑최씨"와 함께 이 "왕씨-(신나라의 멸망후 왕조의 종실이 피난하여 후세에 그 조상 '소호금천'의 직계인 임나 김씨로 성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의 연관성을 생각 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퍼즐을 풀어가듯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비문의 분석을 통해 역사적 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 입니다.
기자箕子가 주무왕의 봉함을 받아 조선을 교화 했든, 아니면 단군세기의 번한세가 말기에 기씨箕氏가 번한으로 귀화하여, 그 후손이 군왕이 되어 기준으로까지 이어졌던 간에 우리 상고사의 가장 민감한 부분임에는 틀림 없는 것으로, 번한의 구도舊都가 왕검성이요, 이가 평양이라 하니 또한 그곳이 "낙랑" 이 틀림 없을진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연결 되는 역사의 역정이라면, 험독의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요동성의 평양이 아니라, 난하의 평양이 아니라,주영왕 태자진의 평양(太原 또는 平陽)이 될 수 밖에 없음은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쨋던 위만에 쫒겨 남한南韓땅으로 옮긴 기준箕準의 종당從黨들은 나중에 청주靑州(산동山東의..) 한씨韓氏의 조상이 된다는 일설에 의거 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건너갔던 한수漢水란 도저히 한강이 될수 없는 중요한 힌트가 되는 것이 연무읍공 "왕파"의 5세손인 광양정후"왕도민(북위의 국구國舅가 됨)"이 "익제翼齊(산동과 강소일대-특히, 제주齊州의 성도省都는 청도靑都 그 일대가 청주靑州가 됩니다.)이주자사연군강공창려二州刺史燕郡康公昌黎(역시 낙랑군치소로 이름난 곳입니다.)한기린韓麒麟(문제의 청주 "한韓"씨 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낙랑군왕은 아닙니다.)"의 사위가 됨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낙랑왕씨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종씨從氏도 짚어봐야 할 일이지만, 이 왕씨와 연관되는 우리에게 낯익은 많은 성姓(경주 최崔, 청주 한韓, 전주 이李)씨들도 되짚어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200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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