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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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사시는 기준서 일가님이 책을 한권 보내주셨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책인데 읽기 전에 책제목만으로도 고봉집 안에 포함된 양선생왕복서라는 것은 집작 할 수 있었습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국역하여 4책으로 발행하고 민족문화추진회 홈페이지(http://minchu.or.kr/munhun/gojunhae/go_haeje.htm)에도 다 올려놓았기 때문에 따로 번역본이 없어도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학술적인 용어와 낮선 한자관용어들로 쉽게 읽기는 그 다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양선생왕복서와 고봉할아버지의 연보에 대하여 인용해봅니다.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할아버지께서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 퇴계가 돌아가신 후, 고봉할아버지는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할아버지가 편지를 보내면서 나중에 참고하거나 책으로 만들기 위해 복사해둔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시자, 고봉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효증(奇孝曾)할아버지가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빠졌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만 하고 간행하지는 못하다가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 6) 봄에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선생왕복서라 이름하였다.
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初名은 趙준)의 협조로 1786년(정조 10)에 중간하였고, 양선생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의 도움을 받아 1788년(정조 12)에 중간하였다.(민족문화추진회 홈피에서 인용)
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11월 18일 임진 진시(辰時)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
중종 27년 (임진 1532년, 6세)
어른처럼 후중하여 다른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학업을 시작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너무 열심히 하느라 힘들겠다고 위로라도 하면 "나는 이 공부가 좋아서 한다."고 대답하였다.
중종 29년(갑오 1534년, 8세)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 상을 당하여 어른처럼 애통해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언제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상례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기일(忌日)이 되면 한 달 전부터 백의(白衣)를 입고 소찬(素饌)을 먹었다.
중종 30년(을미 1535년, 9세)
효경(孝經)을 읽고 필사했는데 글자획이 해정(楷正)하였다.―맏형인 승지공(承旨公)이 교외에서 씨름[角牴戲 소싸움]을 구경하였는데, 아버지 물재공(勿齋公)이 이 사실을 알고는 돌아오라고 불렀다. 그러자 승지공은 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피해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형의 손을 잡으며 만류하기를 "아버님께서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형이 만약 피해 도망간다면, 이는 아버님을 더욱 노엽게 만드는 것이고 잘못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붙들고 돌아왔다.
중종 32년(정유 1537년, 11세)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김공집(金公緝)이 연구(聯句)로 '식(食)'자를 시제(詩題)로 내어 공의 글짓는 것을 시험하자, 공은 즉시 응하여 읊기를 "밥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하였다. 이에 김공이 칭찬하기를 "너의 계부(季父)인 덕양선생(德陽先生 기준(奇遵))이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너 또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하구나." 하였다.
중종 35년(경자 1540년, 14세)
강목(綱目)을 애독하여 매일 한 권씩 읽다.
중종 36년(신축 1541년, 15세)
아버지의 훈계를 손수 기록하여 첩을 만들어 스스로 면려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받았으니, 지금쯤에는 거의 성취가 되었어야 하는데도 기질이 범상하여 어릴 때와 같이 어리석으니, 생각할수록 한스럽다. 지난날의 잘못은 어쩔 수 없거니와, 앞으로는 힘써 노력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으니, 소씨(邵氏)는 견문록(見聞錄)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차기(箚記 책을 읽어 느낀 점을 기록한 것)를 써서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은 것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완미(玩味)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부터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전념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범위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이해 봄 서경부(西京賦) 1백 30구(句)를 지었다.
중종 37년(임인 1542년, 16세)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연구하다.
중종 38년(계묘 1543년, 17세)
전한서(前漢書)와 후한서(後漢書),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다.
중종 39년(갑진 1544년, 18세)
중종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다.
인종 원년(을사 1545년, 19세)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 승하 때와 같이 곡림하고 소식하다.
을사사화(士禍)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다.
명종 원년(병오 1546년, 20세)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을 하다.
명종 2년(정미 1547년, 21세)
정월,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다.
명종 3년(무신 1548년, 22세)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인 함평이씨(咸平李氏)와 혼인하다. 참판 이종수(李從遂)의 증손이다.
명종 4년(기유 1549년, 23세)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여 모두 2등을 하다.
명종 5년(경술 1550년, 24세)
8월,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출생하다.
명종 6년(신해 1551년, 25세)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이 공의 이름을 꺼려 하등의 점수를 주어 낙제하다.
명종 9년(갑인 1554년, 28세)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장원하다. 용산(龍山) 정즐(鄭 )의 상에 조곡(弔哭)하다.
명종 10년(을묘 1555년, 29세)
정월, 아버지 기진(奇進) 상을 당하다.
3월에 집 뒤 경좌(庚坐)의 묘지에 장례하고 묘지(墓誌)를 지었으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를 옮겨 아버지묘 오른쪽 옆에 부장(祔葬)하고 천묘기(遷墓記)를 짓다.
명종 12년(정사 1557년, 31세)
3월, 삼년상을 마치고,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다.
명종 13년(무오 1558년, 32세)
4월,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7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다.
상경길에 태인(泰仁)에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논하다.
10월,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서울 집에서 찾아뵙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보여주니, 선생은 대강만을 간략하게 논하여 돌려보냈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를 찾아 뵙고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생이 일재에게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이라는 것은 다만 이(理)일 뿐이어서 기(氣)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명종 14년(기미 1559년, 33세)
3월, 퇴계선생에게 답서를 보내다.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짓다.
8월,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였다.
명종 15년(경신 1560년, 34세)
3월, 하서 김인후를 조문하다.
5월, 정지운과 천명도에 대하여 서신으로 논하다.
8월,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사단칠정에 대하여 논하다.
명종 16년(신유 1561년, 35세)
9월, 아들 기효민(奇孝閔)이 태어나다.
명종 17년(임술 1562년, 36세)
5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2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옮겼다가 다시 봉교(奉敎)로 옮기다.
명종 18년(계해 1563년, 37세)
정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謝恩)하다.
3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다.
4월, 병으로 상소하여 주서에서 체직되고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5월, 학습시험(學習試驗)에서 중등(中等)을 차지하다. 봉교에서 체직되고 부사정(副司正)에 제수되다.
8월, 논박을 받아 귀향하다. ―당시 이량(李樑)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고봉할아버지가 한 번도 찾아와 보지 않는다 하여 할아버지를 매우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를 사주하여 할아버지와 박소립(朴素立)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문형(李文馨)ㆍ허엽(許曄) 등을 논박하였는데, 할아버지를 첫번째로 지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여 장차 사화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때 할아버지의 종형인 판윤공(判尹公 기대항(奇大恒))이 옥당에 있었는데,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해서 그들을 추방하였으므로 할아버지는 오래지 않아 다시 서용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동궁(東宮)의 부음을 듣고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다.
10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였는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가다.
11월,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명종 19년(갑자 1564년, 38세)
2월, 경연에 입시하여 재상(宰相)과 경연의 중요성을 아뢰고, 또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라고 아뢰다. ―할아버지가 아뢰기를"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기대되니,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성취된 뒤에야 재상의 현부(賢否)를 알아 임용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성덕(聖德)이 숙성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시니, 만약 지금부터 경연에 부지런히 임어하신다면 날로 진취됨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하였고, 또한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아뢰었다
3월, 병으로 상소하여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典籍)·지제교(知製敎)로 옮겨 제수되다.
6월,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제수되다.
7월, 종형 판윤공이 별세하니, 선생은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으며, 행장(行狀)도 지었다.
8월, 숙모 윤씨가―판윤공의 어머니요 복제공의 부인―별세하니, 선생이 초상과 장례식을 맡아 주관하였으며, 만장(輓章)을 지었다.
10월, 병조 좌랑·지제교에 제수되다.
12월, 경현당기(景賢堂記)를 짓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고, 병조 좌랑에 옮겨 제수되다.
명종 20년(을축 1565년, 39세)
2월, 병조 좌랑에 제수되다.
6월,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고 성균관 직강· 지제교에 임명되다. 이조 정랑· 지제교에 제수되다.
10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는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 남양방씨(南陽房氏)의 묘를 참배하다, 할아버지는 왕래할 때마다 성묘하고 청소하였다. 맏형 승지공 기대림(奇大臨)할아버지가 별세하자 평가산(平嘉山) 자좌(子坐)의 묘지에 장사지냈다. ―이보다 앞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묘자리로 이곳을 정해 놓았었는데, 이때에 이곳에다가 맏형을 장사지낸 것이다.
12월, 소재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가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하여 논하다. 이때 소재는 나정암(羅整庵)이 지은《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변론하였다.
명종 21년(병인 1566년, 40세)
4월,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예조 정랑· 지제교에 임명되다.
6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와서 이주(二主 두 신주)의 뜻을 물어와 이주설(二主說)을 지어 돌려보냈다.
10월, 통선랑(通善郞)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다. 사간원 헌납·지제교에 임명되고, 소명(召命)으로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고 사인(舍人)으로 승진하다.
명종 22년(정묘 1567년, 41세)
2월, 사헌부 장령· 지제교에 제수되다.
3월, 성균관 사예·지제교에 제수되다. 이달에 아우 대절(大節)이 ―사평공(司評公)―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효증을 보내어 상례와 장례를 맡아 치르게 하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원접사(遠接使)로서 의주로 출발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향(下鄕)할 수 없었다.
4월, 사인·지제교를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다.
5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다. 원접사 종사관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영접하다. ―당시 명종이 승하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음을 들었기 때문에 빈주(賓主)간의 예수(禮數)는 변절(變節)이 많았다. 두 사신은 중국의 명유(名儒)로서 질문이 많았는데, 빈상(擯相)이 그에 대한 응대를 할아버지에게 일임하여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강론함에 있어 모두 합당하게 하였다.
7월, 복명하고 수숙(嫂叔)간에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잘못임을 논하다.―당시 조정에서는 공의전(恭懿殿)이 명종에게는 형수가 되니, 복을 입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자, 퇴계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형제가 임금의 자리를 계승할 경우, 일찍이 군신간(君臣間)의 관계가 되었으므로 곧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퇴계는 크게 깨달아 글을 써서 조정에 보내기를 "나는 기모(奇某)가 아니었으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 그와 같은 군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변례에 통달한 것을 높이 평가함과 동시에 퇴계가 남의 선을 속히 따르는 것을 칭찬하였다.
8월, 전위사(餞慰使)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복귀 명령을 받다.
10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다. 이달 23일에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다. ―선생은 앞장서서 논하기를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모함에 의하여 죽었는데, 중종 말년에 처음으로 그 억울함을 논하여 당시에 함께 죄를 입은 사람 중엔 간혹 서용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왕(명종)이 어린 나이로 처음 정사를 하게 되자, 소인들이, 사림 중에 학행이 있는 자들을 경박한 무리들이 기묘년과 같은 짓을 한다고 모함하여 끝내 난역(亂逆)의 죄로 처단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대유(大儒)인데도 죄를 얻어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고(禁錮)가 풀리긴 하였으나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직도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장(表章)함으로써 시비를 바로잡아 인심을 올바르게 하소서."하였다.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있는 유신(儒臣)들인데, 오랫동안 귀양가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방환(放還)하였지만, 너무 고령이기 때문에 순서에 따라 등용할 경우 크게 등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초탁(超擢)하시어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로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시강(侍講)하였는데, 아는 것을 숨김없이 극진히 아뢰어 인군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명백하고 간절히 하였으니, 선생의 고충과 지극한 정성은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11월, 석강(夕講)에서 예기(禮記)를 강하고, 사친(私親 선조의 생부모)에게 치제(致祭)하는 것은 잘못임을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예관(禮官)이 관리를 파견하여 사친의 사당에 치제할 것을 청하였고, 제문에 '황백부(皇伯父)'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선생은 외지에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것은 한(漢) 나라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가리킴)이 즉위하여 태뢰(太牢)로 자기 아버지인 창읍애왕(昌邑哀王)을 제사지냈던 것과 같은 실수이다."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진강하는 계제에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대통이 중하고 사친은 경(輕)하므로, 예(禮)에 있어 압존(壓尊)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를 무시하고 치제하였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근래에 예학(禮學)이 밝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러니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인쇄 반포하여 예를 좋아하는 선비들로 하여금 참고하고 기준을 삼게 하소서. 그렇게 하여 예교가 흥하게 되면 풍속이 크게 변하여 치화(治化)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원년(무진 1568년, 42세)
정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고 홍문관직제학 겸 교서관판교에 임명되다.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다. 우부승지로 승진하다.
4월, 신병으로 승지에서 체직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7월, 퇴계선생이 상경하자 가서 인사드리다.―선조는 즉위한 초기에 정성을 다하여 어진 선비를 구하였다. 여러 번 교지를 내려 퇴계를 불렀으나 퇴계가 계속 글을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퇴계에게 서신을 보냈다.
8월, 신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다.
12월, 우승지로 승진하다.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하여 논하다.
선조 2년(기사 1569년, 43세)
3월, 퇴계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고, 보은사(報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다. 배 위에서 한 절구의 이별시를 드렸다. ―시는 다음과 같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漢江滔滔日夜流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찌하면 만류하리/先生此去若爲留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沙邊拽纜遲徊處
애에 가득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不盡離腸萬斛愁
퇴계 역시 시를 지어 답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名流)이니/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종일토록 매여 있네/歸心終日爲牽留
이 한강수 떠다 벼룻물로 써서/願將漢水添行硯
끝없는 작별 시름 써 볼거나/寫出臨分無限愁
또 퇴계 선생은 매화시(梅花詩) 8절구를 지어 선생에게 보이면서 답시를 요구하자, 선생은 또 매화시에 화답하여 퇴계 선생에게 보내드렸다.
이달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4월, 차자를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대하여 논하다. ―이보다 앞서 세종은 한(漢)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소전을 세우고 태조와 사친(四親)의 신주를 모셨는데, 태조가 중앙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고조ㆍ증조ㆍ조(祖)ㆍ고(考) 사친의 신주는 동서로 진열하였다. 성종은 덕종(德宗)을 추존(追尊)하였는데, 예종(睿宗)이 이미 문소전에 부묘(祔廟)되었기 때문에 덕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부묘하였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당시에 조정에서는 의논하기를 "인종을 문소전에 부묘할 경우, 세조가 체천(遞遷)하여야 하는데, 명종에게는 사친의 대수(代數)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체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5실(室)을 넘게 되니, 이는 세종이 문소전을 설립한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이 예의를 돌아보지 않고 인종을 연은전에 부묘하니, 많은 사람들이 분하고 답답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명종이 승하하자, 대신(大臣) 이준경(李浚慶)이 부묘할 것을 건의하니,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의논을 정하자,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하나로 정해졌다.
이달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6월, 9일 할아버지는 동료들을 이끌고 문정전(文政殿)에서 면대(面對)할 것을 청하여 김개(金鎧)의 간사함을 통렬하게 논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사헌 김개는 오랫동안 피해 있다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내심 사론(士論)을 꺼리어 먼저 기묘년의 사류들을 비방하고 조정에도 이러한 습속이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왕의 마음이 자못 김개의 말에 솔깃해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면대할 것을 청하여 김개의 음사(陰邪)하고 정도(正道)를 해치는 정황을 간절히 아뢰었으나 왕은 끝내 살펴 깨닫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귀향할 결심을 하였다.
7월, 신병으로 상소하여 승지에서 체직되다.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9월,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다.
선조 3년(경오 1570년, 44세)
2월, 귀향하려고 출발하여 한강에서 유숙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사대부들이 모두 나와서 전별하였다. 김계 회숙(金啓晦叔)ㆍ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은 강가에서 유숙하기까지 하니, 선생이 시 두 편을 지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리길 돌아가려니 슬픈 생각 간절해/千里歸程欲斷魂
종남산의 안개는 대궐문 가렸네/終南煙霧掩修門
성명하신 우리 임금 빠짐없이 비추는데/吾君聖明無遺照
남의 기롱 두려워 번거로움 꺼리지 않네/恐被人譏不憚煩
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歲月悠悠水共流
천기(天機)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天機如許不曾留
지난해 작별하어 가슴 아파하던 곳/前年惜別傷心地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今日南歸亦自愁
○ 지난해에 퇴계 선생을 작별하면서 지은 시를 차운한 것이다.
5월,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는데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에서 그 뜻을 취하다. ―낙암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있으며, 그 아래 동쪽에도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동료(東寮)'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글에 "집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암자를 새로 짓고는 한가하게 지내며 쉴 곳으로 삼을까 하여 '낙(樂)'자로 현판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전에 보내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씀을 취하여 제가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퇴계선생이 기문을 짓고 편액을 써 주다. 도산기문발(陶山記文跋)을 짓다.
6월, 부경사(赴京使)의 소명이 있자 상소하여 사양하다.
7월, 다시 소명이 있자 재차 상소하여 사양하고 인하여 성현의 출처(出處)에 대한 의리를 말하였다. ―당시 선생은 의리가 합하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는데, 조정에서 부경사로 임명했기 때문에 상소하여 사양한 것이다.
12월,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다.
선조 4년(신미 1571년, 45세)
정월,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지내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신도비명을 짓다.
2월,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저녁 무렵에 귀전암(歸全庵)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孝曾)과 유은(柳溵)ㆍ김경생(金景生)ㆍ이운홍(李運鴻)ㆍ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은 산중턱을 둘러보더니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하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를 이곳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생은 조그마한 암자를 청량봉(淸涼峯) 아래에 지어 학문에 전념할 장소로 삼고 '귀전암(歸全庵)'이라 현판하였으니, 이는 "온전히 몸을 보전해서 돌아간다."는 글의 뜻에서 취한 것이었다.
퇴계선생의 묘갈명과 묘지를 짓다.
3월, 서석산을 유람하였는데, 많은 문인들이 따라갔다.
4월,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고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하여 면직을 요청하다. 이달에 다시 소명을 내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자, 선생은 또다시 상소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문인들과 함께 태극도(太極圖)를 논하다.
9월,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를 짓다. ―이보다 앞서 순천의 선비 허사증(許思曾)이 와서 기문(記文)을 청했었다.
이조 참의에 제수되다.
선조 5년(임신 1572년, 46세)
2월, 아들 기효맹(奇孝孟)이 태어나다.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27일에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다시 소명을 받았다. 선생은 주청사의 임무가 중요하므로 부득이 조정에 나갔는데 도중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종계변무를 중국에 주청하면서 선생을 주청사로 발탁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부득이 소명에 응한 것이다. 선생은 도성에 도착한 다음 신병으로 사신의 행차를 중지하고 변무주(辨誣奏)를 지어 올렸다.
5월,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다.
7월, 공조 참의·지제교에 제수되다.
9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당일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발문을 짓다.
10월 3일,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니, 서울의 선비들이 한강에서 전별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서 벼슬하고 평소 몸가짐에 있어 시종일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군자가 출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또 시세를 알아야 구차한 병폐가 없으며, 끝으로는 선도(善道)를 죽기를 무릅쓰고 지키는 것으로 목적을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선생의 이 답변을 들은 자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나다.
15일, 태인(泰仁)에 도착한 후,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 머물며 치료하다.
25일, 사돈 김점(金 ) ―김점은 할아버지의 큰며느리의 부친이다.― 이 와서 문안하자 관청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여 매당(梅塘)으로 숙소를 옮기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수명은 천명이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개의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어렸을 때에는 시문(詩文)에 힘쓰다가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터득한 것이 있었으나 단지 독실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날마다 엄숙히 반성하며 조심했습니다. 함장(函丈) 사이에 옛 성현의 면모를 접하여 강론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도 크게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사업이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몇 년만 더 살아서 산중에서 유유자적하며 학자들과 함께 끝까지 강론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한 다행일텐데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집안일에 대해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척박한 밭 몇 마지기가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그대의 집은 우리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그대의 집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선생은 시중드는 사람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선생의 병세가 더욱 심해질까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공해(公廨)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갓을 가져와 씌우라고 명하였다. 시중드는 사람이 하려고 하지 않자, 선생은 강요하면서 의관을 차리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저녁에 매당(梅塘)에 도착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안후(安候)를 묻자, 선생은 "이곳에 도착하니 기운이 소생하는 것 같다." 하였다.
이날 선조는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보내어 급히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는 한편,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였다. 오변이 오는 도중 선생이 별세하여 생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어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그대가 태인현(泰仁縣)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을 앓고 있다 하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에게 약을 가지고 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몸을 잘 조리하라."
11월 1일, 운명하다. -30일 저녁에 선생은 아들 효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의 성품은 경박하니, 만약 신중한 뜻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 하시고, 말을 마치자 운명하였다. 이날은 바로 11월 초하루였다. 밤은 이미 4경이었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선생은 정해년에 태어나셨으니 향년은 46세였다. 태인에서부터 선생께 문병하려고 온 원근의 문인들과 유생들은 이때에 이르러 호상(護喪)하고 돌아갔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며 수의(襚衣)를 하사하였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애통해하였으며 남산에 있는 선생의 우사(寓舍)에 가서 신위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식견이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황(李滉)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설을 강구하여 옛 성현들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에 입시할 때에는 말한 것이 요순과 삼왕(三王)의 도(道)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유종(儒宗)으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나서 귀향하는 도중에 죽었습니다. 가세(家勢)가 청한(淸寒)하여 장사지낼 비용이 없으니, 관(官)에서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국가가 유자(儒者)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선조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 )이 논사록(論思錄)을 편찬하다.
선조 6년(계유 1573년)
2월 8일, 나주(羅州)의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자리에 안장하니, 전에 선생이 명령한 곳이었다. 원근에서 함께 장례를 행한 자들이 수백 명이었다.
선조 11년(무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낙암 아래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다. ―이때 황강(黃岡)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본도의 감사로 있었는데 사당을 창건할 초기에 힘써서 주선하였으며, 강진(康津)의 방죽논 30여 석(石)지기를 특별히 사원(祠院)에 편입시켰다. 그 후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감사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노비와 전토(田土)를 주었다.
선조 23년(경인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전에 종계변무주(宗系辨誣奏)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증이 있었던 것이다.―또한 문헌(文憲)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도덕이 있고 옛글을 널리 통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기록할 만한 선행이 있는 것을 '헌(憲)'이라 한다.
선조 임진왜란 후에 서원을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가에 옮겼는데, 낙암과는 거리가 20리 떨어진 곳이다. .
광해군 6년(갑인 1614년)
영암 군수(靈巖郡守) 조찬한(趙纘韓)이 영암에서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를 간행하다.
인조 7년(기사 1629년)
선산 부사(善山府使) 조찬한이 선산에서 고봉집(원집)을 초간하다.
인조 8년(경오 1630년)
조찬한이 선산에서 논사록을 간행하다.
효종 5년(갑오 1654년)
월봉서원(月峯書院)에 사액하다.
효종 6년 (을미1665년)
4월에 사액을 맞았는데, 예조의 낭관(郞官) 원격(元格)이 제문을 가지고 와서 제사지냈다.
정조 10년(병오 1786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중간하다.
정조 12년(무신 1788년)
기언정이 양선생왕복서를 중간하다.
순종 1년(정미 1907년)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집 속집과 별집부록을 편찬하고, 원집과 합편하여 중간하다.
1970년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이 중간본을 석인(石印)으로 삼간하다.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삼간본을 대본으로 고봉집을 국역하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딱딱한 내용에 무슨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못알아볼, 그런책으로 생각했습니다. 양선생왕복서는 고봉집에 나오는 것이니 퇴계 고봉 편지를 쓰다가 아니라 고봉 퇴계 편지를 쓰다여야 하지않나 했는데 퇴계가 먼저 고봉할아버지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되더군요. 당시에도 퇴계 같은 명망있는 유학자에게 대들어 이름을 알리려고 어줍잖은 논쟁을 벌인 것 아니냐는 비난도 들었다는데 읽어보니 번역자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쉬운 문장으로 서로를 높여주고 공경하며 때로는 사적인 그러면서도 학술적인 편지들이었습니다.
430년전 우리집안의 일들을 모아보았습니다.
ㄱ, 1561년 신유 4월 10일 편지 ….계축년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있을 때 종형의 처소에서……
이때 과거보러 서울와서 머물렀던 종형은 누구인가?
ㄴ, 1563년 계해 3월 21일 편지…..몸을 의탁할 데가 없어 가족이 한데 모여 살 계획이나 세우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처자를 서울로 오게 하여 거처할 집을 마련해서 조금 편하게 지낼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 서울과 광주에 두 군데의 집이 있으셨던 듯한데 그때는 집을 사셨나 아니면 전세 같은 것도 있었나?
ㄷ. 1564년 갑자 2월 1일 편지….10월 20일 즈음에 서울로 왔습니다. 그러나 가솔을 이끌고 객지 살림을 하자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탄식이 자못 그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또 섣달 초순에 둘째 아이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아이가 이제 일곱 살로 뭐든지 빨리 째우쳐 사랑스러웠는데, 갑자기 이리 되고 보니 이픈 마음 스스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뒤 막내 아이가 또 위독했으나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오랫동안 걱정 속에서 지내다 보니 정신은 나간 듯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누구신가? 간신히 살려낸 막내는 누구신가?
ㄹ. 1564년 갑자 10월 6일 편지……. 최근에 집안에 화가 자꾸 겹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또한 장례를 치르느라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야 겨우 다 마치고 한숨 돌린 것 같습니다…..
이 초상에 대한 의문은 바로 퇴계의 편지에서 판윤공이라고 나온다.
ㅁ. 1665년 가정 을축 1월 23일 편지……. 저의 가문은 영락하여 여러 종반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온 집안의 높은 조상에 대해 오래도록 예를 거행하지 않아, 고조의 신주가 아직도 제사를 주재하는 집에 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이는 바로 그분의 오대손입니다. 전에 숙모가 살아 계실 때는, 그 분이 증손대가 되기 때문에, 옮겨다가 모실 수가 없어서 감히 체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숙모 역시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제도로 미루어 보건대 체천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이고, 증조도 제사를 이은이에게는 고조가 되니, 이 분도 옮겨다가 모셔야 마땅합니다. 다만 최장이 되는 형이 멀리 호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옮겨다 모시는 예를 행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 하여,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맏며느리가 주제하는 것에 관계되지만, 한때의 편의를 따른 것이니, 행할 수 있는 일인 듯합니다.
고조를 체천하는 의논에 대해서는 종형이 "『주자가례』에도 고조까지 제사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체천하는 것은 편치 않다."했습니다. 만약 다른 집으로 옮기고자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 하여 그대로 그 집의 별실에 모셔 두면, 이것은 오대를 제사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천봉하기가 이미 어렵고 그렇다고 매안하는 것도 편치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나이가 많아서 종숙의 항렬에 있는 이들 가운데 도리어 젊은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인 이치로 말하자면,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혹시 먼저 죽고 그 아들이 제사를 이을 경우, 한 집안에 육대의 제사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예의 본뜻에나 시속의 편의에나 더욱 방해됩니다.
저희 집안이 비록 한미하다고는 하지만, 소종을 받드는 이들이 무려 여나문 집이나 됩니다. 만약 사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를 어기고서, 집안이 돌아가며 제사를 받드는 것을 한 집안의 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또한 의례가 꺼리는 데에 걸리고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게 되어 매우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지금의 제도를 따르는 쪽으로 결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형님이 마침 사당을 세운다고 하시며, 편지를 보내어 몇 분의 감실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여, 새로이 『가례』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종가의 경우에는 삼대로 결정하고, 우리 사당의 경우에는 사대로 정한다면, 남의 일을 처리하고 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판이하게 둘로 갈라져, 더욱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
호남에 있는 최장은 누구시고 감실은 몇 개를 해야한는지가 왜 나오나?
ㅂ. 1568년 융경 2월 19일 편지…….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고향에서 동생이 거상하고 있었는데 지나친 슬픔에 몸을 상한 나머지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소식을 듣자 찢어지는 듯 아음이 아파 말로는 비유할 길이 없고 정신이 모두 나가벼려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고봉할아버지 연보에는 할아버지가 8살때 진주강씨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1555년 아버지 덕성군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묘 오른쪽으로 이장하고 천묘기까지 지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34년후에 거상중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가?
ㅅ. 1570년 경오 4월 17일 편지………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곧 불러 내리려고 했습니다만 작은 아이가 홍역을 앓고 있다 하니 마음이 매우 어지럽습니다…….
작은 아이는 누구신가?
ㅇ. 1570년 경오 5월 9일 편지……홍역을 앓던 딸아이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제 아내가 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딸은 누구인가?
이상의 여러가지 가족 이야기를 이해하기위하여 족보를 다시 펼쳐서 확인을 했습니다. 고봉할아버지의 고조부이신 정무공 건할아버지부터 살펴보면 정무공할아버지는 1390년경에 태어나시어 음력으로는 1460년 12월 29일이지만 양력으로는 1461년 2월 11일 70세 정도 사시고 돌아가셨으며 아들은 축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습니다. 축할아버지는 태어난 해의 기록이 없고 단지 건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3년후인 1464년 3월 9일에 돌아가셨는데 양력으로는 4월 15일 돌아가셨고 아들은 유, 찬, 저, 주, 정 5형제를 두셨습니다. 축할아버지의 첫째아들 유할아버지는 정무공 건 할아버지의 장손으로 덕분에 음서로 평안도 도사를 지내셨지만 생일과 기일의 기록도 없고 아들도 겸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지만 아들은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둘째 정렬공 찬할아버지는 1424년 태어나시어 1492년 6월 16일 양력으로는 7월 10일 68세로 돌아가셨으며 아들은 그 후손들이 지금 우리 행주기씨의 대종을 이루는 형, 원, 괄, 진, 준 5형제를 두셨습니다. 셋째 저할아버지는 과거를 거쳐 벼슬이 부평부사에 이르렀지만 아들은 없습니다. 넷째 주할아버지는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으며 아들은 우할아버지를 두셨습니다. 다섯째 정할아버지 역시 생년과 기일의 기록은 없고 아들은 순, 달, 훈 3형제를 두었습니다.
축할아버지의 큰아들 형할아버지는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고 1501년 문과를 거쳐 손자 령 덕분에 도승지로 추증되셨다. 아들은 대복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으며 후손은 정무공의 장손 유할아버지가 절손되자 정무공의 종손으로 되어 음서로 벼슬을 하셨고 부인은 거의가 종친인 전주이씨입니다.
둘째 원할아버지는 1481년 찬할아버지가 57세 때에 태어나셨으며 1521년 막내 준할아버지가 기묘사화로 죽자 넷째 진 할아버지와 장성으로 낙향하여 그 다음해인 1522년 6월 24일 양력으로는 7월 7일 4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대익, 대유, 대이 3형제를 두셨고 둘째 아들 대유의 셋째 아들 효근할아버지가 임진왜란 3등 공신이 되시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시었다. 아들 3형제의 대어나고 돌아가신 해의 기록은 없고 단지 둘째 며느리 함양 오씨 할머니가 아들 효근할아버지와 돌아가실때의 나이가 91세이셨고 돌아가신 해에서 계산해보면 1507년 때어나셨기 때문에 아들 3형제 분들도 대략 1507년 전후로 태어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원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들은 대략 15세 전후로 20세가 않됬다고 보아야 하고 넷째 진할아버지가 돌봐주신 것이 됩니다. 후손은 장성문중으로 번성하고 있습니다.
셋째 괄할아버지는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해의 기록이 없지만 바로 위의 형 원할아버지가 1481년 생이시고 바로 아래 동생 진할아버지가 1487년 생이시며 위에 형들과는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대략 1484년이나 1485년 경에 찬할아버지가 60세에서 61세 경에 태어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은 대관, 대정 형제를 두셨지만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으며 큰며느리가 세종대왕의 증손녀신것으로 보아 이때 까지 정무공의 후손으로 왕실과 외척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진할아버지는 고봉할아버지의 아버지로 1487년 찬할아버지가 63세대 태어나시어 1555년 1월 15일 양력으로 2월 6일 6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아들 대승할아버지가 광국공신이 되면서 덕성군으로 츠증되셨습니다. 아들은 대림, 대승, 대절, 소과 4형제를 두셨습니다. 후손은 광주문중을 이루어 번성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대림할아버지는 1526년 진할아바지가 39세때 태어나시어 족보에는 돌아가신해 기록이 없지만 고봉할아버지 연보에는 1565년 11월 22일 양력으로는 12월 14일 3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대승할아버지는 1527년 진할아버지가 40세때 태어나셨습니다. 셋째 대절할아버지는 족보에는 태어나신 해와 돌아가신 해의 기록은 없고 고봉할아버지 연보에 1567년 3월에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은 없으시다. 넷째 소과할아버지는 아들 3형제와 함께 이름만 남고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다섯째 준할아버지는 1492년 찬할아버지가 68세때에 태어나시어 이해에 찬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으며 기묘사화 후에 1521년 10월 28일 29세로 인조의 명령에 의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대항할아버지로 기묘사화가 나던 1519년 태어나시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이 되시고 3일만인 1564년 7월 27일 4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응세할아버지 한분은 두셨고 손자는 영의정 만전공 자헌할아버지입니다. 5형제분들이 찬할아버지가 지금으로 보아도 늦으신 나이에 태어나시어 정무공할아버지 전설에 제주도 귀신들이 음덕을 기렸다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고봉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고조부부터 4촌까지를 대략 정리하였다. 서간집에 처음나오는 과거보러 서울와서 머문집은 여러 4촌들 중에 대항할아버지집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진할아버지가 두번째 장가드시어 39세에 큰아들 대림할아버지를 보시고 40세에 대승할아버지를 보셨기 때문에 대림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는 大자 항렬중에는 가장 어린분들 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4촌들과는 거의 20세이상 나이차이가 난다고고 봅니. 아무래도 다른 분들보다 10살정도로 나이차이가 적은 대항할아버지가 편했을 테고 더구나 숙모님이 살아계시며 잘 보살펴 주셨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정이 1564년 갑자 10월 6일 편지에 최근에 집안에 화가 자꾸 겹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한 것은 7월 17일에 대항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충격이신지 대항할아버지의 어머니로 대승할아버지의 숙모님이신 파평 윤씨할머니가 8월 11일에 연이어 돌아가십니다. 그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대항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의 우애는 이량의 탄핵에서 절정을 이룬다. 대항할아버지는 이량과는 같은 당인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량이 대승할아버지를 탄핵하여 해를 입히려하자 오히려 이량을 탄핵하여 숙청시킨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대손이오, 왕비의 외숙부이다. 임자년에 문과급제하였는데 윤원형이 임금의 권력을 침해하므로 왕이 갑자기 총애하고 발탁하여, 몇년 안되어 낮은 벼슬로부터 판서에 올렸으니 왕이 윤원형을 두려워하여 이량을 내세워 윤원형과 대항하게 하려함이었다. 이량이 왕의 총애하자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다 휩쓸려 추종하였다. (중략) 기대승 윤근수는 후진으로서 사류의 칭찬을 받으니, 이량의 무리가 꺼려하였다. 이에 이감이 대사헌이 되어, 이문형 ·허엽 ·박소립 ·윤두수 ·윤근수 ·기대승 등이 부박하여 서로 선동한다고 탄핵하여, 삭직되어 외임으로 나갔다. 이량이 이문형 등을 몰아 내쫓은 뒤에 세상의 인심이 크게 놀랐으므로 심의겸이 이량을 제거할 생각을 가졌다. 일찌기 ,(왕비 친정인) 심씨 집에서 권력을 쓸 이가 없어서 비록 이량의 위인을 알지만 이량의 사람됨이 집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기대항으로 하여금 돕게 하면 일이 될 것이라 하여 시험 삼아 썼더니, 며칠 사이에 당파를 조정에 가득 채워 권세가 윤원형을 압도하므로 윤원형이 또한 "두려워하였다. 수년 후에 심의겸이 과거에 급제하니 권세가 저절로 서로 나누이게 되자, 이량이 이를 싫어하여 하루는 그 무리를 모아 사림에 화를 일으키려고 문을 닫고 의논하는 차에 심의겸이 그 집에 왔다. 문지키는 자가 주인이 외출하였다 하였으나 심의겸이 문을 박차고 바로 들어가 병풍 뒤에서 몰래 들으니)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내쫓을 것이요,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삭탈할 것이다" 하고 차례로 죄를 논하는데 의론이 채 끝나기 전에 심의겸이 갑자기 병풍 밖으로 나오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이튿날 (그들이) 먼저 허엽과 박소립 등을 죄주니 모두 일세의 명사들이라 조정과 민간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의겸이 곧 비밀리에 이량의 죄상을 왕비에게 아뢰니, 이미 외숙의 어리석음을 알고 조정의 일을 맡겼음은 누구의 과실인가. 대전에서도 역시 아신다" 하였다. 이에 심의겸이 곧 기대항을 불러 의논하기를, "일이 장차 혜아릴 수 없을 것이니, 부제학은 이를 탄핵하라" 하니 기대항이 놀라서 대답을 못하였다. 심의겸이, "벌써 왕비의 명을 받들었다" 하고 내어 보이니, 기대항이 뛸 듯이 좋아하였다. 이튿날 동료들과 중학에서 모임을 가진 뒤에 기대항이 이량의 집에 들려 조용히 이야기하고 남은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사헌 이감이 이량에게 편지로 연통하기를, (뜻밖에 옥당에서 중학에 모이는 것이 염려되니, 이 무슨 일이요) 하였다. 이량이 답하기를 “부제학이 지금 나를 보고 갔는데, 무슨 일이 있겠소. 책을 교정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조금 뒤에 이량의 무리 수십 명을 탄핵하여 죄를 정하니, 이량은 강계로 귀양가서 죽고 이감은 경원으로 귀양가서 죽었으며, 일곱 간신인 김백균 ·황삼성 ·이영 등은 모두 귀양 가고 삭탈되었다. 또 양사가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음을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564년 갑자 2월 1일 편지에 나오는 1563년 섣달 초순에 7살로 돌아가신 둘째 아들은 누구신가 족보를 찾아보았으나 1563년에서 7살을 뺀 1557년생 아들은 없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기씨의 족보는 100년후인 1664년에 최초로 발행되었으니 그전에 가승은 있었겠지만 당연합니다. 언젠가 일비장전설(종중홈/기가의 전설에 있음)의 행주기씨부인이 차례로는 몇째인가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족보에는 생년기록이 없고 시집가신 울산 김씨 족보는 본적이 없어서 형제분들 생년만을 따져보았습니다. 고봉할아버지의 큰아들 효증할아버지가 1550년생이시고 둘째 효민할아버지가 1561년생이시며 셋째 효맹할아버지가 1572년생으로 형제들간에 10살이상씩 나이차이가나서 행주기씨부인 대고모가 둘째인지 넷째인지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랐는데, 대고모를 소재로한 연극 강건너 너부실(광곡)이란 대본(사랑방/일반자료실에 올려 놓았음)에는 손목을 자르고 투신 자결하실 때가 27세로 나옵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 족보와 울산김씨 족보를 참고했겠지 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넷째라는 확증을 주고있습니다. 7살에 돌아가신 둘째 아드님은 효증할아버지와 효민할아버지 사이의 아드님이신 것입니다. 그 뒤 막내 아이가 또 위독했으나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라는 대목에서 그 막내란 당시에는 효맹할아버지나 대고모는 태어나기 전이므로 효민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1570년 경오 4월 17일 편지에서 작은 아이가 홍역을 앓고 있다 하는 작은 아들도 효민할아버지이십니다. 1570년 경오 5월 9일 편지에 홍역을 앓던 딸아이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라는 것을 보면 홍역을 잘 이겨내시기는 했으나 대고모에게 옮겨주신 것을 알수있습니다. 효민할아버지는 두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셨지만 족보기록에는 정유왜변시피화라고 해서 정유재란때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효민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동생 효맹할아버지도 같이 화를 당하셨고 부인 남원 양씨할머니와 재수씨인 광산 정씨 할머니도 여동생인 행주기씨부인과 함께 맥동 강물에 투신 자결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마음 착잡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사신분들이십니다. 그래도 효민할아버지는 아들 둘이 있어 한분은 나정에 한분은 고양에 후손이 사시고 묘소는 없어서 나정에 있는 큰아들 영헌할아버지 묘소 곁에 추모단이 있지만 효맹할아버지는 그나마 후손도, 추모단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씨할머니와 정씨할머니도, 같이 투신자결하신 대고모는 열려문이라도 있지만 추모비 하나도 없다. 울산 김씨 보다 우리가 못난 탓인가?
1665년 1월23일 편지는 430년전 우리집안에 대하여 가장 많은 정보를 주고 계십니다. 처음 글을 읽을때는 최장의 형은 호남에 계신다든가, 형님이 사당을 짖는데 감실을 몇 개 만들어야 하는냐는 것이 가장 이해 할수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봉할아버지의 형님은 승지공 대림할아버지신데 이분은 장남이기는 해도 아버님이신 덕성군 진할아버지가 넷째시니 아버님 감실만 만들면 되고 그 윗대는 큰집인 도승지공 형할아버지 집안에서 지내면 되는데 무슨 몇 개의 감실운운하는 것인가가 첫째고 체장의 말뜻을 잘못이해하여 장손으로보고는 장손이 호남에 있다는 말이 이상했던 겁니다. 서울사시는 형할아버지의 후손중에서 증손자 수할아버지가 나주로 이주한 것은 알지만 대림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가 아무리 늦게 태어나셨어도 조카항렬도 아니고 손자항렬에서 종손이 나오고 그분이 나주로 벌써 이주하셨다는 것이 이해할수도 없었고 더구나 수할아버지는 형할아버지의 둘째손자의 둘째 아들이시니 장손도 아닙니다. 이 의문을 풀기위해 여러 번 글을 읽어보고 내용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430년전과 비교할 대상인 현제의 제사예법을 통달한 것이 아니라 함부로 설명하기는 죄송합니다만 들은 대로 읽은 대로 이해를 해보았습니다. 지금우리는 고조부까지 4대를 기제사집냅니다. 4고조부이상의 5대조 이상은 신주를 묘에 뭍고(매안) 음력 10월에 날짜를 정해 시제를 지냅니다. 이때 기제사 지내는 고조의 기준은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을 기준으로 합니다. 작은아버지가 살아계셔도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없다면 종손의 고조까지만 지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손의 5대조는 작은 아버지에게는 고주부시니 작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법이라 하는데 이를 체천이라하고 8촌사이에 제사를 전하여 주었나 보닙니다만 지금은 거의 지내지를 않지요. 430년전 우리의 할아버지께서도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계시군요. 4대까지 지내야하는지 3대까지 지내야하는지 등등… 종손이란 어쩌면 제사모시는 임무가 가장 클텐데 편지에는 (만약 사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 라고하여 종손의 개념도 없어보입니다. 만약 큰아들이 아들없이 죽으면 둘째아들에게 제사를 물려주어아 하는가 아니면 큰아들의 아들없는 부인에게 전중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지금의 호주제도에 대한 찬반논리와 어쪄면 그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후에는 며느리도 아니고 둘째도 아닌 양자를 들이는 것으로 결정되어 시행이 됩니다. 당시는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는 전통이 없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없으면 없는대로 살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자는 사실 고봉할아버지의 큰손자 정헌할아버지가 6촌형 방헌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원할아버지를 양자로 들여서 고봉할아버지의 종손으로 삼은 것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 전에 양자제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정무공 건할아버지의 큰손자 유할아버지가 절손될 것이 아니라 동생인 축할아버지의 다섯 아들중에 한분을 양자로 들여서 정무공 할아버지의 종손을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않고 그냥 절손되어 둘째이신 축할아버지의 큰아들 형할아버지가 가문의 장손역활을 하게되었습니다. 430년전 당시에 축할아버지의 5형제 후손이 소종을 이루어 따로 가문을 이루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볼수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장손의 개념보다는 건할아버지의 몇대손인가에 따라 같은 항렬에서 최장자가 죽으면 8촌끼리 제사를 전해주어 당시에 대자항렬에서 가장 어리다고 볼수있는 덕성군할아버지의 큰아들 승지공 대림할아버지에게 전해져 온 겁니다. 대림할아버지는 아버지이신 덕성군할아버지외에 몇분을 더 제사지내야 하는지 더 많이 예법을 공부한 동생 대승할아버지에게 물어본 것이지요. 최장의 형은 호남에 사신다는 형은 대림할아버지를 말합니다. 대림할아버지도 감실을 몇개 만들어야 하는지 물으신 그해에 돌아가셨으니 그후에는 대승할아버지가 제사를 물려 받으셨겠지요.
책을 읽으며 왠 잔병치례가 그렇게 많으신지 눈물나는 가슴 찡한 내용도 있고 조금 고지식해 보인다는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감동적인 책입니다. 이책뿐만이 아니라 우리선조들이 남기신 문집들을 후손을 위해 번역하여 인터넷에 올려서 후손들이 참고하게 해야 겠는데 가장 지지자가 많을 족보조차도 쉬운일이 아니니 언제하려나요? 고봉집외에 노사집도 연구논문이 많은데 연구하시는 분들이 혼자만 보지않고 이렇게 책으로 펴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 역사스페셜이 소재빈곤인지 했던내용 이리저리 편집하여 나오는 것이 많던데 이책도 많이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알리려던 고봉할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서 좋고 역사스페셜의 주제로 선정되어 기황후이후 다시 한번 영상으로 편지를 볼 수 있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3.05.11
양선생왕복서와 고봉할아버지의 연보에 대하여 인용해봅니다.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는 1558년부터 1570년까지 13년간 고봉할아버지께서 퇴계와 서로 왕복한 편지를 날짜순으로 모아 편집한 것이다. 1570년 12월 퇴계가 돌아가신 후, 고봉할아버지는 보관하고 있던 퇴계의 편지와 할아버지가 편지를 보내면서 나중에 참고하거나 책으로 만들기 위해 복사해둔 부본을 바탕으로 무오년(1558)부터 정묘년(1567)까지의 편지를 모아 2권의 책으로 만들고 퇴계서척(退溪書尺)이라 하였다. 2년 뒤 고봉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시자, 고봉할아버지의 큰아들 기효증(奇孝曾)할아버지가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도움을 받아 퇴계서척에 빠졌던 무진년(1568)에서 경오년(1570)까지 3년간의 편지를 정리만 하고 간행하지는 못하다가 사위인 조찬한이 1612년 영암 군수로 부임하자, 이의 간행을 의논하여 1613년 10월에 간행을 시작하여 1614년(광해군 6) 봄에 영암에서 목판으로 3권 3책을 간행하고 양선생왕복서라 이름하였다.
이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청주서원(淸州書院)에서 일찍이 간행되었으나 실전된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 곧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몽촌(夢村) 김종수(金鍾秀)의 교정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조경(趙璥;初名은 趙준)의 협조로 1786년(정조 10)에 중간하였고, 양선생왕복서는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의 도움을 받아 1788년(정조 12)에 중간하였다.(민족문화추진회 홈피에서 인용)
중종 22년(정해 1527년, 1세)
11월 18일 임진 진시(辰時)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나다.
중종 27년 (임진 1532년, 6세)
어른처럼 후중하여 다른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중종 28년(계사 1533년, 7세)
학업을 시작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너무 열심히 하느라 힘들겠다고 위로라도 하면 "나는 이 공부가 좋아서 한다."고 대답하였다.
중종 29년(갑오 1534년, 8세)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 상을 당하여 어른처럼 애통해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언제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상례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기일(忌日)이 되면 한 달 전부터 백의(白衣)를 입고 소찬(素饌)을 먹었다.
중종 30년(을미 1535년, 9세)
효경(孝經)을 읽고 필사했는데 글자획이 해정(楷正)하였다.―맏형인 승지공(承旨公)이 교외에서 씨름[角牴戲 소싸움]을 구경하였는데, 아버지 물재공(勿齋公)이 이 사실을 알고는 돌아오라고 불렀다. 그러자 승지공은 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피해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공은 형의 손을 잡으며 만류하기를 "아버님께서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형이 만약 피해 도망간다면, 이는 아버님을 더욱 노엽게 만드는 것이고 잘못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붙들고 돌아왔다.
중종 32년(정유 1537년, 11세)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김공집(金公緝)이 연구(聯句)로 '식(食)'자를 시제(詩題)로 내어 공의 글짓는 것을 시험하자, 공은 즉시 응하여 읊기를 "밥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하였다. 이에 김공이 칭찬하기를 "너의 계부(季父)인 덕양선생(德陽先生 기준(奇遵))이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너 또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하구나." 하였다.
중종 35년(경자 1540년, 14세)
강목(綱目)을 애독하여 매일 한 권씩 읽다.
중종 36년(신축 1541년, 15세)
아버지의 훈계를 손수 기록하여 첩을 만들어 스스로 면려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받았으니, 지금쯤에는 거의 성취가 되었어야 하는데도 기질이 범상하여 어릴 때와 같이 어리석으니, 생각할수록 한스럽다. 지난날의 잘못은 어쩔 수 없거니와, 앞으로는 힘써 노력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으니, 소씨(邵氏)는 견문록(見聞錄)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차기(箚記 책을 읽어 느낀 점을 기록한 것)를 써서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은 것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완미(玩味)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부터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전념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범위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이해 봄 서경부(西京賦) 1백 30구(句)를 지었다.
중종 37년(임인 1542년, 16세)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연구하다.
중종 38년(계묘 1543년, 17세)
전한서(前漢書)와 후한서(後漢書),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다.
중종 39년(갑진 1544년, 18세)
중종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다.
인종 원년(을사 1545년, 19세)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 승하 때와 같이 곡림하고 소식하다.
을사사화(士禍)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다.
명종 원년(병오 1546년, 20세)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을 하다.
명종 2년(정미 1547년, 21세)
정월,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다.
명종 3년(무신 1548년, 22세)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인 함평이씨(咸平李氏)와 혼인하다. 참판 이종수(李從遂)의 증손이다.
명종 4년(기유 1549년, 23세)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여 모두 2등을 하다.
명종 5년(경술 1550년, 24세)
8월, 장자 기효증(奇孝曾)이 출생하다.
명종 6년(신해 1551년, 25세)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이 공의 이름을 꺼려 하등의 점수를 주어 낙제하다.
명종 9년(갑인 1554년, 28세)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장원하다. 용산(龍山) 정즐(鄭 )의 상에 조곡(弔哭)하다.
명종 10년(을묘 1555년, 29세)
정월, 아버지 기진(奇進) 상을 당하다.
3월에 집 뒤 경좌(庚坐)의 묘지에 장례하고 묘지(墓誌)를 지었으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를 옮겨 아버지묘 오른쪽 옆에 부장(祔葬)하고 천묘기(遷墓記)를 짓다.
명종 12년(정사 1557년, 31세)
3월, 삼년상을 마치고,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다.
명종 13년(무오 1558년, 32세)
4월,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다.
7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다.
상경길에 태인(泰仁)에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논하다.
10월,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서울 집에서 찾아뵙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보여주니, 선생은 대강만을 간략하게 논하여 돌려보냈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를 찾아 뵙고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생이 일재에게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이라는 것은 다만 이(理)일 뿐이어서 기(氣)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명종 14년(기미 1559년, 33세)
3월, 퇴계선생에게 답서를 보내다.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짓다.
8월,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였다.
명종 15년(경신 1560년, 34세)
3월, 하서 김인후를 조문하다.
5월, 정지운과 천명도에 대하여 서신으로 논하다.
8월,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사단칠정에 대하여 논하다.
명종 16년(신유 1561년, 35세)
9월, 아들 기효민(奇孝閔)이 태어나다.
명종 17년(임술 1562년, 36세)
5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2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옮겼다가 다시 봉교(奉敎)로 옮기다.
명종 18년(계해 1563년, 37세)
정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謝恩)하다.
3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제수되다.
4월, 병으로 상소하여 주서에서 체직되고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5월, 학습시험(學習試驗)에서 중등(中等)을 차지하다. 봉교에서 체직되고 부사정(副司正)에 제수되다.
8월, 논박을 받아 귀향하다. ―당시 이량(李樑)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고봉할아버지가 한 번도 찾아와 보지 않는다 하여 할아버지를 매우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사헌부를 사주하여 할아버지와 박소립(朴素立)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문형(李文馨)ㆍ허엽(許曄) 등을 논박하였는데, 할아버지를 첫번째로 지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여 장차 사화를 일으키려 하였다. 이때 할아버지의 종형인 판윤공(判尹公 기대항(奇大恒))이 옥당에 있었는데, 차자를 올려 이량 등의 죄를 논해서 그들을 추방하였으므로 할아버지는 오래지 않아 다시 서용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다. 동궁(東宮)의 부음을 듣고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다.
10월,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였는데,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들어가다.
11월, 선무랑(宣務郞)에 제수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다.
명종 19년(갑자 1564년, 38세)
2월, 경연에 입시하여 재상(宰相)과 경연의 중요성을 아뢰고, 또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라고 아뢰다. ―할아버지가 아뢰기를"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기대되니,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성취된 뒤에야 재상의 현부(賢否)를 알아 임용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성덕(聖德)이 숙성하시어 성리학에 마음을 두고 계시니, 만약 지금부터 경연에 부지런히 임어하신다면 날로 진취됨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하였고, 또한 언로(言路)를 열어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반복해서 아뢰었다
3월, 병으로 상소하여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典籍)·지제교(知製敎)로 옮겨 제수되다.
6월,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제수되다.
7월, 종형 판윤공이 별세하니, 선생은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으며, 행장(行狀)도 지었다.
8월, 숙모 윤씨가―판윤공의 어머니요 복제공의 부인―별세하니, 선생이 초상과 장례식을 맡아 주관하였으며, 만장(輓章)을 지었다.
10월, 병조 좌랑·지제교에 제수되다.
12월, 경현당기(景賢堂記)를 짓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고, 병조 좌랑에 옮겨 제수되다.
명종 20년(을축 1565년, 39세)
2월, 병조 좌랑에 제수되다.
6월, 승의랑(承議郞)에 제수되고 성균관 직강· 지제교에 임명되다. 이조 정랑· 지제교에 제수되다.
10월,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청주(淸州) 수신리(修身里)에 있는 아버지의 첫번째 부인 남양방씨(南陽房氏)의 묘를 참배하다, 할아버지는 왕래할 때마다 성묘하고 청소하였다. 맏형 승지공 기대림(奇大臨)할아버지가 별세하자 평가산(平嘉山) 자좌(子坐)의 묘지에 장사지냈다. ―이보다 앞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묘자리로 이곳을 정해 놓았었는데, 이때에 이곳에다가 맏형을 장사지낸 것이다.
12월, 소재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가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하여 논하다. 이때 소재는 나정암(羅整庵)이 지은《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변론하였다.
명종 21년(병인 1566년, 40세)
4월,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고 예조 정랑· 지제교에 임명되다.
6월,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계(金啓)가 와서 이주(二主 두 신주)의 뜻을 물어와 이주설(二主說)을 지어 돌려보냈다.
10월, 통선랑(通善郞)에 제수되고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다. 사간원 헌납·지제교에 임명되고, 소명(召命)으로 조정에 돌아와 사은하고 사인(舍人)으로 승진하다.
명종 22년(정묘 1567년, 41세)
2월, 사헌부 장령· 지제교에 제수되다.
3월, 성균관 사예·지제교에 제수되다. 이달에 아우 대절(大節)이 ―사평공(司評公)―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효증을 보내어 상례와 장례를 맡아 치르게 하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원접사(遠接使)로서 의주로 출발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향(下鄕)할 수 없었다.
4월, 사인·지제교를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다.
5월,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다. 원접사 종사관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영접하다. ―당시 명종이 승하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음을 들었기 때문에 빈주(賓主)간의 예수(禮數)는 변절(變節)이 많았다. 두 사신은 중국의 명유(名儒)로서 질문이 많았는데, 빈상(擯相)이 그에 대한 응대를 할아버지에게 일임하여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강론함에 있어 모두 합당하게 하였다.
7월, 복명하고 수숙(嫂叔)간에 복을 입지 않는 것은 잘못임을 논하다.―당시 조정에서는 공의전(恭懿殿)이 명종에게는 형수가 되니, 복을 입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자, 퇴계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형제가 임금의 자리를 계승할 경우, 일찍이 군신간(君臣間)의 관계가 되었으므로 곧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은 것이니, 마땅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퇴계는 크게 깨달아 글을 써서 조정에 보내기를 "나는 기모(奇某)가 아니었으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 그와 같은 군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변례에 통달한 것을 높이 평가함과 동시에 퇴계가 남의 선을 속히 따르는 것을 칭찬하였다.
8월, 전위사(餞慰使)로 의주(義州)에 갔다가 복귀 명령을 받다.
10월,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제수되고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다. 이달 23일에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다. ―선생은 앞장서서 논하기를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모함에 의하여 죽었는데, 중종 말년에 처음으로 그 억울함을 논하여 당시에 함께 죄를 입은 사람 중엔 간혹 서용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왕(명종)이 어린 나이로 처음 정사를 하게 되자, 소인들이, 사림 중에 학행이 있는 자들을 경박한 무리들이 기묘년과 같은 짓을 한다고 모함하여 끝내 난역(亂逆)의 죄로 처단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대유(大儒)인데도 죄를 얻어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고(禁錮)가 풀리긴 하였으나 그에 대한 옳고 그름이 아직도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장(表章)함으로써 시비를 바로잡아 인심을 올바르게 하소서."하였다.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이 있는 유신(儒臣)들인데, 오랫동안 귀양가 있었습니다. 지금 비록 방환(放還)하였지만, 너무 고령이기 때문에 순서에 따라 등용할 경우 크게 등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초탁(超擢)하시어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로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시강(侍講)하였는데, 아는 것을 숨김없이 극진히 아뢰어 인군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여 세도(世道)를 만회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명백하고 간절히 하였으니, 선생의 고충과 지극한 정성은 임금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11월, 석강(夕講)에서 예기(禮記)를 강하고, 사친(私親 선조의 생부모)에게 치제(致祭)하는 것은 잘못임을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예관(禮官)이 관리를 파견하여 사친의 사당에 치제할 것을 청하였고, 제문에 '황백부(皇伯父)'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선생은 외지에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이것은 한(漢) 나라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가리킴)이 즉위하여 태뢰(太牢)로 자기 아버지인 창읍애왕(昌邑哀王)을 제사지냈던 것과 같은 실수이다."라고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진강하는 계제에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대통이 중하고 사친은 경(輕)하므로, 예(禮)에 있어 압존(壓尊)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를 무시하고 치제하였으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근래에 예학(禮學)이 밝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러니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인쇄 반포하여 예를 좋아하는 선비들로 하여금 참고하고 기준을 삼게 하소서. 그렇게 하여 예교가 흥하게 되면 풍속이 크게 변하여 치화(治化)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 원년(무진 1568년, 42세)
정월,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제수되고 홍문관직제학 겸 교서관판교에 임명되다.
2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고 승정원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다. 우부승지로 승진하다.
4월, 신병으로 승지에서 체직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7월, 퇴계선생이 상경하자 가서 인사드리다.―선조는 즉위한 초기에 정성을 다하여 어진 선비를 구하였다. 여러 번 교지를 내려 퇴계를 불렀으나 퇴계가 계속 글을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퇴계에게 서신을 보냈다.
8월, 신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다.
12월, 우승지로 승진하다.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하여 논하다.
선조 2년(기사 1569년, 43세)
3월, 퇴계선생을 동호(東湖)에서 전송하고, 보은사(報恩寺)까지 따라가 송별하다. 배 위에서 한 절구의 이별시를 드렸다. ―시는 다음과 같다.
한강수는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니/漢江滔滔日夜流
떠나시는 우리 선생 어찌하면 만류하리/先生此去若爲留
강변에서 닻줄 끌고 이리저리 배회할 제/沙邊拽纜遲徊處
애에 가득찬 이 시름을 어이하리/不盡離腸萬斛愁
퇴계 역시 시를 지어 답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배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 참으로 명류(名流)이니/列坐方舟盡勝流
돌아가고픈 마음 종일토록 매여 있네/歸心終日爲牽留
이 한강수 떠다 벼룻물로 써서/願將漢水添行硯
끝없는 작별 시름 써 볼거나/寫出臨分無限愁
또 퇴계 선생은 매화시(梅花詩) 8절구를 지어 선생에게 보이면서 답시를 요구하자, 선생은 또 매화시에 화답하여 퇴계 선생에게 보내드렸다.
이달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4월, 차자를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대하여 논하다. ―이보다 앞서 세종은 한(漢) 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소전을 세우고 태조와 사친(四親)의 신주를 모셨는데, 태조가 중앙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향하고, 고조ㆍ증조ㆍ조(祖)ㆍ고(考) 사친의 신주는 동서로 진열하였다. 성종은 덕종(德宗)을 추존(追尊)하였는데, 예종(睿宗)이 이미 문소전에 부묘(祔廟)되었기 때문에 덕종을 연은전(延恩殿)에 부묘하였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당시에 조정에서는 의논하기를 "인종을 문소전에 부묘할 경우, 세조가 체천(遞遷)하여야 하는데, 명종에게는 사친의 대수(代數)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체천하지 않을 경우에는 5실(室)을 넘게 되니, 이는 세종이 문소전을 설립한 본의가 아니다." 하였다. 이에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이 예의를 돌아보지 않고 인종을 연은전에 부묘하니, 많은 사람들이 분하고 답답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명종이 승하하자, 대신(大臣) 이준경(李浚慶)이 부묘할 것을 건의하니,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오래도록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때에 선생이 차자를 올려 의논을 정하자, 많은 사람들의 의논이 하나로 정해졌다.
이달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6월, 9일 할아버지는 동료들을 이끌고 문정전(文政殿)에서 면대(面對)할 것을 청하여 김개(金鎧)의 간사함을 통렬하게 논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사헌 김개는 오랫동안 피해 있다가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내심 사론(士論)을 꺼리어 먼저 기묘년의 사류들을 비방하고 조정에도 이러한 습속이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왕의 마음이 자못 김개의 말에 솔깃해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면대할 것을 청하여 김개의 음사(陰邪)하고 정도(正道)를 해치는 정황을 간절히 아뢰었으나 왕은 끝내 살펴 깨닫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할아버지는 귀향할 결심을 하였다.
7월, 신병으로 상소하여 승지에서 체직되다.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9월, 병으로 대사성에서 체직되다.
선조 3년(경오 1570년, 44세)
2월, 귀향하려고 출발하여 한강에서 유숙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사대부들이 모두 나와서 전별하였다. 김계 회숙(金啓晦叔)ㆍ김취려 이정(金就礪而精)은 강가에서 유숙하기까지 하니, 선생이 시 두 편을 지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리길 돌아가려니 슬픈 생각 간절해/千里歸程欲斷魂
종남산의 안개는 대궐문 가렸네/終南煙霧掩修門
성명하신 우리 임금 빠짐없이 비추는데/吾君聖明無遺照
남의 기롱 두려워 번거로움 꺼리지 않네/恐被人譏不憚煩
세월은 유유히 물처럼 흐르는데/歲月悠悠水共流
천기(天機)도 이와 같아 멈추질 않는구려/天機如許不曾留
지난해 작별하어 가슴 아파하던 곳/前年惜別傷心地
오늘 귀향길도 근심만 절로 나네/今日南歸亦自愁
○ 지난해에 퇴계 선생을 작별하면서 지은 시를 차운한 것이다.
5월, 낙암(樂庵)이 완성되었는데 빈당익가락(貧當益可樂)에서 그 뜻을 취하다. ―낙암은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있으며, 그 아래 동쪽에도 몇 칸의 집을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거처하게 하고 '동료(東寮)'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글에 "집 가까운 산기슭에 조그마한 암자를 새로 짓고는 한가하게 지내며 쉴 곳으로 삼을까 하여 '낙(樂)'자로 현판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전에 보내주신 편지에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말씀을 취하여 제가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퇴계선생이 기문을 짓고 편액을 써 주다. 도산기문발(陶山記文跋)을 짓다.
6월, 부경사(赴京使)의 소명이 있자 상소하여 사양하다.
7월, 다시 소명이 있자 재차 상소하여 사양하고 인하여 성현의 출처(出處)에 대한 의리를 말하였다. ―당시 선생은 의리가 합하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는데, 조정에서 부경사로 임명했기 때문에 상소하여 사양한 것이다.
12월, 퇴계선생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다.
선조 4년(신미 1571년, 45세)
정월, 도산(陶山)으로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지내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신도비명을 짓다.
2월, 가묘(家廟)에 시사(時祀)를 지내고 저녁 무렵에 귀전암(歸全庵)에 가서 구경하였는데, 이때 아들 효증(孝曾)과 유은(柳溵)ㆍ김경생(金景生)ㆍ이운홍(李運鴻)ㆍ곽호(郭顥)가 따라갔다. 선생은 산중턱을 둘러보더니 효증을 불러 한 곳을 지적하면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훗날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를 이곳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생은 조그마한 암자를 청량봉(淸涼峯) 아래에 지어 학문에 전념할 장소로 삼고 '귀전암(歸全庵)'이라 현판하였으니, 이는 "온전히 몸을 보전해서 돌아간다."는 글의 뜻에서 취한 것이었다.
퇴계선생의 묘갈명과 묘지를 짓다.
3월, 서석산을 유람하였는데, 많은 문인들이 따라갔다.
4월,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에 제수되고 소명이 있었으나 상소하여 면직을 요청하다. 이달에 다시 소명을 내려 빨리 오라고 재촉하자, 선생은 또다시 상소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문인들과 함께 태극도(太極圖)를 논하다.
9월, 옥천서원기(玉川書院記)를 짓다. ―이보다 앞서 순천의 선비 허사증(許思曾)이 와서 기문(記文)을 청했었다.
이조 참의에 제수되다.
선조 5년(임신 1572년, 46세)
2월, 아들 기효맹(奇孝孟)이 태어나다.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다. 27일에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다시 소명을 받았다. 선생은 주청사의 임무가 중요하므로 부득이 조정에 나갔는데 도중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종계변무를 중국에 주청하면서 선생을 주청사로 발탁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은 부득이 소명에 응한 것이다. 선생은 도성에 도착한 다음 신병으로 사신의 행차를 중지하고 변무주(辨誣奏)를 지어 올렸다.
5월, 병으로 대사간에서 체직되다.
7월, 공조 참의·지제교에 제수되다.
9월,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당일 병으로 상소하여 체직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발문을 짓다.
10월 3일,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니, 서울의 선비들이 한강에서 전별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서 벼슬하고 평소 몸가짐에 있어 시종일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 하였다. 그 뜻은 대개 군자가 출처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 또 시세를 알아야 구차한 병폐가 없으며, 끝으로는 선도(善道)를 죽기를 무릅쓰고 지키는 것으로 목적을 삼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선생의 이 답변을 들은 자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10일, 천안(天安)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나다.
15일, 태인(泰仁)에 도착한 후, 병이 악화되어 그곳에 머물며 치료하다.
25일, 사돈 김점(金 ) ―김점은 할아버지의 큰며느리의 부친이다.― 이 와서 문안하자 관청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여 매당(梅塘)으로 숙소를 옮기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의 수명은 천명이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개의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어렸을 때에는 시문(詩文)에 힘쓰다가 마침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터득한 것이 있었으나 단지 독실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평소의 뜻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되어 날마다 엄숙히 반성하며 조심했습니다. 함장(函丈) 사이에 옛 성현의 면모를 접하여 강론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도 크게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다만 사업이 고인(古人)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몇 년만 더 살아서 산중에서 유유자적하며 학자들과 함께 끝까지 강론할 수 있다면 이것도 한 다행일텐데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집안일에 대해 묻자, 선생은 대답하기를 "척박한 밭 몇 마지기가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그대의 집은 우리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그대의 집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선생은 시중드는 사람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은 선생의 병세가 더욱 심해질까 걱정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공해(公廨)에서 죽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갓을 가져와 씌우라고 명하였다. 시중드는 사람이 하려고 하지 않자, 선생은 강요하면서 의관을 차리고는 가마에 올라탔다. 저녁에 매당(梅塘)에 도착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안후(安候)를 묻자, 선생은 "이곳에 도착하니 기운이 소생하는 것 같다." 하였다.
이날 선조는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御醫) 오변(吳忭)을 보내어 급히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는 한편, 어찰(御札)을 내려 위문하였다. 오변이 오는 도중 선생이 별세하여 생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어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그대가 태인현(泰仁縣)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을 앓고 있다 하니, 내 마음이 무척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에게 약을 가지고 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몸을 잘 조리하라."
11월 1일, 운명하다. -30일 저녁에 선생은 아들 효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의 성품은 경박하니, 만약 신중한 뜻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면 나는 걱정이 없겠다." 하시고, 말을 마치자 운명하였다. 이날은 바로 11월 초하루였다. 밤은 이미 4경이었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과 번개가 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선생은 정해년에 태어나셨으니 향년은 46세였다. 태인에서부터 선생께 문병하려고 온 원근의 문인들과 유생들은 이때에 이르러 호상(護喪)하고 돌아갔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며 수의(襚衣)를 하사하였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애통해하였으며 남산에 있는 선생의 우사(寓舍)에 가서 신위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식견이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황(李滉)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설을 강구하여 옛 성현들이 미처 발명(發明)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연에 입시할 때에는 말한 것이 요순과 삼왕(三王)의 도(道)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유종(儒宗)으로 추대하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나서 귀향하는 도중에 죽었습니다. 가세(家勢)가 청한(淸寒)하여 장사지낼 비용이 없으니, 관(官)에서 상례와 장례를 주선하여 국가가 유자(儒者)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선조의 명으로 검열 허봉(許 )이 논사록(論思錄)을 편찬하다.
선조 6년(계유 1573년)
2월 8일, 나주(羅州)의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자리에 안장하니, 전에 선생이 명령한 곳이었다. 원근에서 함께 장례를 행한 자들이 수백 명이었다.
선조 11년(무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낙암 아래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다. ―이때 황강(黃岡) 김공 계휘(金公繼輝)가 본도의 감사로 있었는데 사당을 창건할 초기에 힘써서 주선하였으며, 강진(康津)의 방죽논 30여 석(石)지기를 특별히 사원(祠院)에 편입시켰다. 그 후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감사가 되어 힘써 돌보았으며 노비와 전토(田土)를 주었다.
선조 23년(경인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전에 종계변무주(宗系辨誣奏)를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증이 있었던 것이다.―또한 문헌(文憲)의 시호를 하사하였다. ―도덕이 있고 옛글을 널리 통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기록할 만한 선행이 있는 것을 '헌(憲)'이라 한다.
선조 임진왜란 후에 서원을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가에 옮겼는데, 낙암과는 거리가 20리 떨어진 곳이다. .
광해군 6년(갑인 1614년)
영암 군수(靈巖郡守) 조찬한(趙纘韓)이 영암에서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를 간행하다.
인조 7년(기사 1629년)
선산 부사(善山府使) 조찬한이 선산에서 고봉집(원집)을 초간하다.
인조 8년(경오 1630년)
조찬한이 선산에서 논사록을 간행하다.
효종 5년(갑오 1654년)
월봉서원(月峯書院)에 사액하다.
효종 6년 (을미1665년)
4월에 사액을 맞았는데, 예조의 낭관(郞官) 원격(元格)이 제문을 가지고 와서 제사지냈다.
정조 10년(병오 1786년)
6대손 기언정(奇彦鼎)이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서(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와 논사록을 중간하다.
정조 12년(무신 1788년)
기언정이 양선생왕복서를 중간하다.
순종 1년(정미 1907년)
11대손 기동준(奇東準)이 고봉집 속집과 별집부록을 편찬하고, 원집과 합편하여 중간하다.
1970년
기영환(奇永桓), 기형섭(奇亨燮), 기세훈(奇世勳) 등이 중간본을 석인(石印)으로 삼간하다.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삼간본을 대본으로 고봉집을 국역하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딱딱한 내용에 무슨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못알아볼, 그런책으로 생각했습니다. 양선생왕복서는 고봉집에 나오는 것이니 퇴계 고봉 편지를 쓰다가 아니라 고봉 퇴계 편지를 쓰다여야 하지않나 했는데 퇴계가 먼저 고봉할아버지께 편지를 보낸 것으로 시작되더군요. 당시에도 퇴계 같은 명망있는 유학자에게 대들어 이름을 알리려고 어줍잖은 논쟁을 벌인 것 아니냐는 비난도 들었다는데 읽어보니 번역자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쉬운 문장으로 서로를 높여주고 공경하며 때로는 사적인 그러면서도 학술적인 편지들이었습니다.
430년전 우리집안의 일들을 모아보았습니다.
ㄱ, 1561년 신유 4월 10일 편지 ….계축년에 과거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있을 때 종형의 처소에서……
이때 과거보러 서울와서 머물렀던 종형은 누구인가?
ㄴ, 1563년 계해 3월 21일 편지…..몸을 의탁할 데가 없어 가족이 한데 모여 살 계획이나 세우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처자를 서울로 오게 하여 거처할 집을 마련해서 조금 편하게 지낼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 서울과 광주에 두 군데의 집이 있으셨던 듯한데 그때는 집을 사셨나 아니면 전세 같은 것도 있었나?
ㄷ. 1564년 갑자 2월 1일 편지….10월 20일 즈음에 서울로 왔습니다. 그러나 가솔을 이끌고 객지 살림을 하자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탄식이 자못 그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또 섣달 초순에 둘째 아이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아이가 이제 일곱 살로 뭐든지 빨리 째우쳐 사랑스러웠는데, 갑자기 이리 되고 보니 이픈 마음 스스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뒤 막내 아이가 또 위독했으나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오랫동안 걱정 속에서 지내다 보니 정신은 나간 듯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누구신가? 간신히 살려낸 막내는 누구신가?
ㄹ. 1564년 갑자 10월 6일 편지……. 최근에 집안에 화가 자꾸 겹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또한 장례를 치르느라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야 겨우 다 마치고 한숨 돌린 것 같습니다…..
이 초상에 대한 의문은 바로 퇴계의 편지에서 판윤공이라고 나온다.
ㅁ. 1665년 가정 을축 1월 23일 편지……. 저의 가문은 영락하여 여러 종반들이 흩어져 살기 때문에, 온 집안의 높은 조상에 대해 오래도록 예를 거행하지 않아, 고조의 신주가 아직도 제사를 주재하는 집에 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이는 바로 그분의 오대손입니다. 전에 숙모가 살아 계실 때는, 그 분이 증손대가 되기 때문에, 옮겨다가 모실 수가 없어서 감히 체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숙모 역시 돌아가셨으니, 지금의 제도로 미루어 보건대 체천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이고, 증조도 제사를 이은이에게는 고조가 되니, 이 분도 옮겨다가 모셔야 마땅합니다. 다만 최장이 되는 형이 멀리 호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옮겨다 모시는 예를 행하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다 하여, 다른 집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비록 맏며느리가 주제하는 것에 관계되지만, 한때의 편의를 따른 것이니, 행할 수 있는 일인 듯합니다.
고조를 체천하는 의논에 대해서는 종형이 "『주자가례』에도 고조까지 제사한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체천하는 것은 편치 않다."했습니다. 만약 다른 집으로 옮기고자 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행하기 어려운 형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다 하여 그대로 그 집의 별실에 모셔 두면, 이것은 오대를 제사하는 것이 됩니다.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천봉하기가 이미 어렵고 그렇다고 매안하는 것도 편치 않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제사를 주재하는 이의 나이가 많아서 종숙의 항렬에 있는 이들 가운데 도리어 젊은 사람이 많습니다. 상식적인 이치로 말하자면, 제사를 주재하는 이가 혹시 먼저 죽고 그 아들이 제사를 이을 경우, 한 집안에 육대의 제사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예의 본뜻에나 시속의 편의에나 더욱 방해됩니다.
저희 집안이 비록 한미하다고는 하지만, 소종을 받드는 이들이 무려 여나문 집이나 됩니다. 만약 사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를 어기고서, 집안이 돌아가며 제사를 받드는 것을 한 집안의 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또한 의례가 꺼리는 데에 걸리고 옳지 못한 죄를 범하게 되어 매우 불편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지금의 제도를 따르는 쪽으로 결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형님이 마침 사당을 세운다고 하시며, 편지를 보내어 몇 분의 감실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 때문에 다시 마음이 편치 아니하여, 새로이 『가례』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결정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종가의 경우에는 삼대로 결정하고, 우리 사당의 경우에는 사대로 정한다면, 남의 일을 처리하고 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판이하게 둘로 갈라져, 더욱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
호남에 있는 최장은 누구시고 감실은 몇 개를 해야한는지가 왜 나오나?
ㅂ. 1568년 융경 2월 19일 편지…….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고향에서 동생이 거상하고 있었는데 지나친 슬픔에 몸을 상한 나머지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소식을 듣자 찢어지는 듯 아음이 아파 말로는 비유할 길이 없고 정신이 모두 나가벼려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고봉할아버지 연보에는 할아버지가 8살때 진주강씨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1555년 아버지 덕성군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묘 오른쪽으로 이장하고 천묘기까지 지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34년후에 거상중이라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가?
ㅅ. 1570년 경오 4월 17일 편지………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곧 불러 내리려고 했습니다만 작은 아이가 홍역을 앓고 있다 하니 마음이 매우 어지럽습니다…….
작은 아이는 누구신가?
ㅇ. 1570년 경오 5월 9일 편지……홍역을 앓던 딸아이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제 아내가 출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딸은 누구인가?
이상의 여러가지 가족 이야기를 이해하기위하여 족보를 다시 펼쳐서 확인을 했습니다. 고봉할아버지의 고조부이신 정무공 건할아버지부터 살펴보면 정무공할아버지는 1390년경에 태어나시어 음력으로는 1460년 12월 29일이지만 양력으로는 1461년 2월 11일 70세 정도 사시고 돌아가셨으며 아들은 축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습니다. 축할아버지는 태어난 해의 기록이 없고 단지 건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3년후인 1464년 3월 9일에 돌아가셨는데 양력으로는 4월 15일 돌아가셨고 아들은 유, 찬, 저, 주, 정 5형제를 두셨습니다. 축할아버지의 첫째아들 유할아버지는 정무공 건 할아버지의 장손으로 덕분에 음서로 평안도 도사를 지내셨지만 생일과 기일의 기록도 없고 아들도 겸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지만 아들은 이름 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둘째 정렬공 찬할아버지는 1424년 태어나시어 1492년 6월 16일 양력으로는 7월 10일 68세로 돌아가셨으며 아들은 그 후손들이 지금 우리 행주기씨의 대종을 이루는 형, 원, 괄, 진, 준 5형제를 두셨습니다. 셋째 저할아버지는 과거를 거쳐 벼슬이 부평부사에 이르렀지만 아들은 없습니다. 넷째 주할아버지는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으며 아들은 우할아버지를 두셨습니다. 다섯째 정할아버지 역시 생년과 기일의 기록은 없고 아들은 순, 달, 훈 3형제를 두었습니다.
축할아버지의 큰아들 형할아버지는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고 1501년 문과를 거쳐 손자 령 덕분에 도승지로 추증되셨다. 아들은 대복할아버지 한분을 두셨으며 후손은 정무공의 장손 유할아버지가 절손되자 정무공의 종손으로 되어 음서로 벼슬을 하셨고 부인은 거의가 종친인 전주이씨입니다.
둘째 원할아버지는 1481년 찬할아버지가 57세 때에 태어나셨으며 1521년 막내 준할아버지가 기묘사화로 죽자 넷째 진 할아버지와 장성으로 낙향하여 그 다음해인 1522년 6월 24일 양력으로는 7월 7일 41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대익, 대유, 대이 3형제를 두셨고 둘째 아들 대유의 셋째 아들 효근할아버지가 임진왜란 3등 공신이 되시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시었다. 아들 3형제의 대어나고 돌아가신 해의 기록은 없고 단지 둘째 며느리 함양 오씨 할머니가 아들 효근할아버지와 돌아가실때의 나이가 91세이셨고 돌아가신 해에서 계산해보면 1507년 때어나셨기 때문에 아들 3형제 분들도 대략 1507년 전후로 태어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원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들들은 대략 15세 전후로 20세가 않됬다고 보아야 하고 넷째 진할아버지가 돌봐주신 것이 됩니다. 후손은 장성문중으로 번성하고 있습니다.
셋째 괄할아버지는 태어나시고 돌아가신 해의 기록이 없지만 바로 위의 형 원할아버지가 1481년 생이시고 바로 아래 동생 진할아버지가 1487년 생이시며 위에 형들과는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대략 1484년이나 1485년 경에 찬할아버지가 60세에서 61세 경에 태어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은 대관, 대정 형제를 두셨지만 생년과 돌아가신 기록은 없으며 큰며느리가 세종대왕의 증손녀신것으로 보아 이때 까지 정무공의 후손으로 왕실과 외척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진할아버지는 고봉할아버지의 아버지로 1487년 찬할아버지가 63세대 태어나시어 1555년 1월 15일 양력으로 2월 6일 6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아들 대승할아버지가 광국공신이 되면서 덕성군으로 츠증되셨습니다. 아들은 대림, 대승, 대절, 소과 4형제를 두셨습니다. 후손은 광주문중을 이루어 번성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대림할아버지는 1526년 진할아바지가 39세때 태어나시어 족보에는 돌아가신해 기록이 없지만 고봉할아버지 연보에는 1565년 11월 22일 양력으로는 12월 14일 39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대승할아버지는 1527년 진할아버지가 40세때 태어나셨습니다. 셋째 대절할아버지는 족보에는 태어나신 해와 돌아가신 해의 기록은 없고 고봉할아버지 연보에 1567년 3월에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은 없으시다. 넷째 소과할아버지는 아들 3형제와 함께 이름만 남고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다섯째 준할아버지는 1492년 찬할아버지가 68세때에 태어나시어 이해에 찬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으며 기묘사화 후에 1521년 10월 28일 29세로 인조의 명령에 의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대항할아버지로 기묘사화가 나던 1519년 태어나시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이 되시고 3일만인 1564년 7월 27일 4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응세할아버지 한분은 두셨고 손자는 영의정 만전공 자헌할아버지입니다. 5형제분들이 찬할아버지가 지금으로 보아도 늦으신 나이에 태어나시어 정무공할아버지 전설에 제주도 귀신들이 음덕을 기렸다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고봉할아버지를 중심으로 고조부부터 4촌까지를 대략 정리하였다. 서간집에 처음나오는 과거보러 서울와서 머문집은 여러 4촌들 중에 대항할아버지집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진할아버지가 두번째 장가드시어 39세에 큰아들 대림할아버지를 보시고 40세에 대승할아버지를 보셨기 때문에 대림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는 大자 항렬중에는 가장 어린분들 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4촌들과는 거의 20세이상 나이차이가 난다고고 봅니. 아무래도 다른 분들보다 10살정도로 나이차이가 적은 대항할아버지가 편했을 테고 더구나 숙모님이 살아계시며 잘 보살펴 주셨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정이 1564년 갑자 10월 6일 편지에 최근에 집안에 화가 자꾸 겹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한 것은 7월 17일에 대항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충격이신지 대항할아버지의 어머니로 대승할아버지의 숙모님이신 파평 윤씨할머니가 8월 11일에 연이어 돌아가십니다. 그 때문에 심적으로 많이 힘드셨던 것 같습니다. 대항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의 우애는 이량의 탄핵에서 절정을 이룬다. 대항할아버지는 이량과는 같은 당인으로 서로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량이 대승할아버지를 탄핵하여 해를 입히려하자 오히려 이량을 탄핵하여 숙청시킨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 (이량은 효령대군의 5대손이오, 왕비의 외숙부이다. 임자년에 문과급제하였는데 윤원형이 임금의 권력을 침해하므로 왕이 갑자기 총애하고 발탁하여, 몇년 안되어 낮은 벼슬로부터 판서에 올렸으니 왕이 윤원형을 두려워하여 이량을 내세워 윤원형과 대항하게 하려함이었다. 이량이 왕의 총애하자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다 휩쓸려 추종하였다. (중략) 기대승 윤근수는 후진으로서 사류의 칭찬을 받으니, 이량의 무리가 꺼려하였다. 이에 이감이 대사헌이 되어, 이문형 ·허엽 ·박소립 ·윤두수 ·윤근수 ·기대승 등이 부박하여 서로 선동한다고 탄핵하여, 삭직되어 외임으로 나갔다. 이량이 이문형 등을 몰아 내쫓은 뒤에 세상의 인심이 크게 놀랐으므로 심의겸이 이량을 제거할 생각을 가졌다. 일찌기 ,(왕비 친정인) 심씨 집에서 권력을 쓸 이가 없어서 비록 이량의 위인을 알지만 이량의 사람됨이 집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기대항으로 하여금 돕게 하면 일이 될 것이라 하여 시험 삼아 썼더니, 며칠 사이에 당파를 조정에 가득 채워 권세가 윤원형을 압도하므로 윤원형이 또한 "두려워하였다. 수년 후에 심의겸이 과거에 급제하니 권세가 저절로 서로 나누이게 되자, 이량이 이를 싫어하여 하루는 그 무리를 모아 사림에 화를 일으키려고 문을 닫고 의논하는 차에 심의겸이 그 집에 왔다. 문지키는 자가 주인이 외출하였다 하였으나 심의겸이 문을 박차고 바로 들어가 병풍 뒤에서 몰래 들으니)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내쫓을 것이요, 누구는 무슨 죄가 있으니 삭탈할 것이다" 하고 차례로 죄를 논하는데 의론이 채 끝나기 전에 심의겸이 갑자기 병풍 밖으로 나오니,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놀라 얼굴빛이 변했다. 이튿날 (그들이) 먼저 허엽과 박소립 등을 죄주니 모두 일세의 명사들이라 조정과 민간에서 두려워하였다. 심의겸이 곧 비밀리에 이량의 죄상을 왕비에게 아뢰니, 이미 외숙의 어리석음을 알고 조정의 일을 맡겼음은 누구의 과실인가. 대전에서도 역시 아신다" 하였다. 이에 심의겸이 곧 기대항을 불러 의논하기를, "일이 장차 혜아릴 수 없을 것이니, 부제학은 이를 탄핵하라" 하니 기대항이 놀라서 대답을 못하였다. 심의겸이, "벌써 왕비의 명을 받들었다" 하고 내어 보이니, 기대항이 뛸 듯이 좋아하였다. 이튿날 동료들과 중학에서 모임을 가진 뒤에 기대항이 이량의 집에 들려 조용히 이야기하고 남은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사헌 이감이 이량에게 편지로 연통하기를, (뜻밖에 옥당에서 중학에 모이는 것이 염려되니, 이 무슨 일이요) 하였다. 이량이 답하기를 “부제학이 지금 나를 보고 갔는데, 무슨 일이 있겠소. 책을 교정하는 데 지나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조금 뒤에 이량의 무리 수십 명을 탄핵하여 죄를 정하니, 이량은 강계로 귀양가서 죽고 이감은 경원으로 귀양가서 죽었으며, 일곱 간신인 김백균 ·황삼성 ·이영 등은 모두 귀양 가고 삭탈되었다. 또 양사가 침묵을 지켜 말하지 않음을 탄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564년 갑자 2월 1일 편지에 나오는 1563년 섣달 초순에 7살로 돌아가신 둘째 아들은 누구신가 족보를 찾아보았으나 1563년에서 7살을 뺀 1557년생 아들은 없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기씨의 족보는 100년후인 1664년에 최초로 발행되었으니 그전에 가승은 있었겠지만 당연합니다. 언젠가 일비장전설(종중홈/기가의 전설에 있음)의 행주기씨부인이 차례로는 몇째인가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족보에는 생년기록이 없고 시집가신 울산 김씨 족보는 본적이 없어서 형제분들 생년만을 따져보았습니다. 고봉할아버지의 큰아들 효증할아버지가 1550년생이시고 둘째 효민할아버지가 1561년생이시며 셋째 효맹할아버지가 1572년생으로 형제들간에 10살이상씩 나이차이가나서 행주기씨부인 대고모가 둘째인지 넷째인지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랐는데, 대고모를 소재로한 연극 강건너 너부실(광곡)이란 대본(사랑방/일반자료실에 올려 놓았음)에는 손목을 자르고 투신 자결하실 때가 27세로 나옵니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 족보와 울산김씨 족보를 참고했겠지 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넷째라는 확증을 주고있습니다. 7살에 돌아가신 둘째 아드님은 효증할아버지와 효민할아버지 사이의 아드님이신 것입니다. 그 뒤 막내 아이가 또 위독했으나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라는 대목에서 그 막내란 당시에는 효맹할아버지나 대고모는 태어나기 전이므로 효민할아버지라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1570년 경오 4월 17일 편지에서 작은 아이가 홍역을 앓고 있다 하는 작은 아들도 효민할아버지이십니다. 1570년 경오 5월 9일 편지에 홍역을 앓던 딸아이가 위독해지는 바람에 라는 것을 보면 홍역을 잘 이겨내시기는 했으나 대고모에게 옮겨주신 것을 알수있습니다. 효민할아버지는 두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셨지만 족보기록에는 정유왜변시피화라고 해서 정유재란때 돌아가신 것으로 나옵니다. 효민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동생 효맹할아버지도 같이 화를 당하셨고 부인 남원 양씨할머니와 재수씨인 광산 정씨 할머니도 여동생인 행주기씨부인과 함께 맥동 강물에 투신 자결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마음 착잡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사신분들이십니다. 그래도 효민할아버지는 아들 둘이 있어 한분은 나정에 한분은 고양에 후손이 사시고 묘소는 없어서 나정에 있는 큰아들 영헌할아버지 묘소 곁에 추모단이 있지만 효맹할아버지는 그나마 후손도, 추모단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양씨할머니와 정씨할머니도, 같이 투신자결하신 대고모는 열려문이라도 있지만 추모비 하나도 없다. 울산 김씨 보다 우리가 못난 탓인가?
1665년 1월23일 편지는 430년전 우리집안에 대하여 가장 많은 정보를 주고 계십니다. 처음 글을 읽을때는 최장의 형은 호남에 계신다든가, 형님이 사당을 짖는데 감실을 몇 개 만들어야 하는냐는 것이 가장 이해 할수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봉할아버지의 형님은 승지공 대림할아버지신데 이분은 장남이기는 해도 아버님이신 덕성군 진할아버지가 넷째시니 아버님 감실만 만들면 되고 그 윗대는 큰집인 도승지공 형할아버지 집안에서 지내면 되는데 무슨 몇 개의 감실운운하는 것인가가 첫째고 체장의 말뜻을 잘못이해하여 장손으로보고는 장손이 호남에 있다는 말이 이상했던 겁니다. 서울사시는 형할아버지의 후손중에서 증손자 수할아버지가 나주로 이주한 것은 알지만 대림할아버지와 대승할아버지가 아무리 늦게 태어나셨어도 조카항렬도 아니고 손자항렬에서 종손이 나오고 그분이 나주로 벌써 이주하셨다는 것이 이해할수도 없었고 더구나 수할아버지는 형할아버지의 둘째손자의 둘째 아들이시니 장손도 아닙니다. 이 의문을 풀기위해 여러 번 글을 읽어보고 내용을 알수가 있었습니다. 430년전과 비교할 대상인 현제의 제사예법을 통달한 것이 아니라 함부로 설명하기는 죄송합니다만 들은 대로 읽은 대로 이해를 해보았습니다. 지금우리는 고조부까지 4대를 기제사집냅니다. 4고조부이상의 5대조 이상은 신주를 묘에 뭍고(매안) 음력 10월에 날짜를 정해 시제를 지냅니다. 이때 기제사 지내는 고조의 기준은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을 기준으로 합니다. 작은아버지가 살아계셔도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없다면 종손의 고조까지만 지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손의 5대조는 작은 아버지에게는 고주부시니 작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법이라 하는데 이를 체천이라하고 8촌사이에 제사를 전하여 주었나 보닙니다만 지금은 거의 지내지를 않지요. 430년전 우리의 할아버지께서도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계시군요. 4대까지 지내야하는지 3대까지 지내야하는지 등등… 종손이란 어쩌면 제사모시는 임무가 가장 클텐데 편지에는 (만약 사대를 봉사하는 것으로 정한다면,마땅히 집안의 일족이 돌아가면서 받들어야지, 단지 종가에서만 할 것이 아닙니다 ) 라고하여 종손의 개념도 없어보입니다. 만약 큰아들이 아들없이 죽으면 둘째아들에게 제사를 물려주어아 하는가 아니면 큰아들의 아들없는 부인에게 전중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지금의 호주제도에 대한 찬반논리와 어쪄면 그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후에는 며느리도 아니고 둘째도 아닌 양자를 들이는 것으로 결정되어 시행이 됩니다. 당시는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는 전통이 없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없으면 없는대로 살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자는 사실 고봉할아버지의 큰손자 정헌할아버지가 6촌형 방헌할아버지의 셋째 아들 원할아버지를 양자로 들여서 고봉할아버지의 종손으로 삼은 것이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 전에 양자제도가 있었다면 당연히 정무공 건할아버지의 큰손자 유할아버지가 절손될 것이 아니라 동생인 축할아버지의 다섯 아들중에 한분을 양자로 들여서 정무공 할아버지의 종손을 삼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않고 그냥 절손되어 둘째이신 축할아버지의 큰아들 형할아버지가 가문의 장손역활을 하게되었습니다. 430년전 당시에 축할아버지의 5형제 후손이 소종을 이루어 따로 가문을 이루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볼수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장손의 개념보다는 건할아버지의 몇대손인가에 따라 같은 항렬에서 최장자가 죽으면 8촌끼리 제사를 전해주어 당시에 대자항렬에서 가장 어리다고 볼수있는 덕성군할아버지의 큰아들 승지공 대림할아버지에게 전해져 온 겁니다. 대림할아버지는 아버지이신 덕성군할아버지외에 몇분을 더 제사지내야 하는지 더 많이 예법을 공부한 동생 대승할아버지에게 물어본 것이지요. 최장의 형은 호남에 사신다는 형은 대림할아버지를 말합니다. 대림할아버지도 감실을 몇개 만들어야 하는지 물으신 그해에 돌아가셨으니 그후에는 대승할아버지가 제사를 물려 받으셨겠지요.
책을 읽으며 왠 잔병치례가 그렇게 많으신지 눈물나는 가슴 찡한 내용도 있고 조금 고지식해 보인다는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감동적인 책입니다. 이책뿐만이 아니라 우리선조들이 남기신 문집들을 후손을 위해 번역하여 인터넷에 올려서 후손들이 참고하게 해야 겠는데 가장 지지자가 많을 족보조차도 쉬운일이 아니니 언제하려나요? 고봉집외에 노사집도 연구논문이 많은데 연구하시는 분들이 혼자만 보지않고 이렇게 책으로 펴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 역사스페셜이 소재빈곤인지 했던내용 이리저리 편집하여 나오는 것이 많던데 이책도 많이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알리려던 고봉할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서 좋고 역사스페셜의 주제로 선정되어 기황후이후 다시 한번 영상으로 편지를 볼 수 있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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