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공 시장諡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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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諡狀
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인데, 세상에서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본디 행주인(幸州人)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京畿)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었다. 그의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했는데,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의 융성함이 국사(國史)에 갖추 실려 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 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건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치사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조정에서 불러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분의 시호는 정무(貞武)이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축(軸)인데 승지에 증직되었고, 조(祖) 휘 찬(纘)은 응교(應敎)로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로 아우 복재(服齋) 준(遵)과 함께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시골에 물러가 살았는데 대신(大臣)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공의 훈전(勳典)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고, 공신호(功臣號)가 내리고 군(君)에 봉해졌다. 부인은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영수(永壽)의 딸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인데, 가정(嘉靖) 정해년(중종 22, 1527) 11월 18일에 공을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집에서 낳았다.
공은 겨우 5~6세가 되어서부터 침착하고 묵중하기가 마치 성인(成人)같았다. 7세 때에는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하여 읽되, 새벽이면 일어나 똑바르게 앉아서 저녁 늦도록 글 읽기를 중지하지 않으므로, 동복(僮僕)이 시험삼아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 그 뜻을 떠보니, 공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이 맛을 어찌 알겠느냐." 하였다.
8세 때에 모부인(母夫人)이 졸하자, 부르짖어 통곡하며 슬픔이 극진하므로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상을 마치고 나서는, 집안의 번잡한 일들 때문에 공부에 장애가 되는 것을 싫어하여 향숙(鄕塾)으로 나가 배웠는데, 학업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총명하고 기억력도 뛰어나서 같이 배우던 다른 아이들이 배운 것까지 겸하여 통했으며, 시구를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그를 훈계한 글이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정신을 집중시켜 오직 날로 부지런히 하였고, 과거 보기 위한 공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중종과 인종이 서로 이어 승하하자, 공은 포의(布衣)의 동년(童年)으로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소식(素食)을 하였다. 을사년 사림의 변을 들었을 때는 식사를 그만두고 눈물만 흘리다가 인하여 문을 굳게 닫고 수년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
기유년에 처음으로 응시하여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두 방(榜)에 다 합격함으로써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시장(試場)에서 상대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윤원형(尹元衡)이 그를 꺼린 나머지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줄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버렸다. 그러나 공은 역시 그것을 개의하지 않았다.
을묘년에 물재공이 졸하자, 여묘살이로 3년상을 마치고, 나이 32세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무오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때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있을 때여서 선생에게 나아가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질문하고 힐난하는 가운데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후 퇴계가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내가 서울을 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때문이다." 하였다.
맨 처음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正字)에 올라 사관(史官)의 천거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았다. 신유년 여름에 비로소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고, 예에 따라 봉교(奉敎)에 승진되었다. 계해년에 승정원 주서에 옮겨졌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다시 봉교가 되었으나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깎여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진용하여 그를 견제시켰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을 의지하여 권력을 빙자해서 매우 기세를 부렸다. 공은 한때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청의(淸議)를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공 등을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차 사림의 화가 일어나게 되어 중외(中外)가 크게 경악하였다. 수일 후에 옥당(玉堂)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 사실을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닫고, 이량 등을 찬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史官)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추중하게 되었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에 사체(辭遞)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고, 병조 좌랑ㆍ성균관 전적ㆍ직강(直講)을 거쳐 이조 정랑에 승진하여 교서관 교리를 겸했다. 그 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예조 정랑ㆍ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인년 10월에 헌납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에 승진되었고, 정묘년에는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체직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을 역임하였다. 공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 비록 누차 요직을 역임하면서도 항상 한가한 곳을 요구하였다.
정묘년 5월에는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다. 때마침 명종이 승하하였는데, 조사가 중로에서 부음(訃音)을 받았기 때문에 빈주(賓主)간의 예문(禮文)에 변례(變禮)가 많았다. 게다가 두 조사는 모두 박식하고 예의 바른 유신(儒臣)들로서 서로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대부분 상규(常規)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는데, 공이 혼자서 그 응접을 담당하여 모두 그 뜻에 맞도록 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전직되었는데, 경연에 입시하여 맨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죽었습니다. 중종 말기에 비로소 그 억울함을 알아, 동시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 가운데 혹은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 명종)이 어린 나이로 막 즉위했을 때에 소인들이 또 학행이 있는 사림을 무함하여,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인(己卯人)들의 기습(氣習)을 다시 일으킨다고 몰아서 끝내 난역(亂逆)의 율(律)로 논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 드문 큰 선비였는데, 역시 죄를 얻어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 열렸다 할지라도 시비는 아직도 분명치 않으니, 청컨대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해서 시비를 바르게 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 높은 유신으로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지금 비록 방환되기는 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50~60세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차서를 따라 진용시킨다면 크게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의당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시켜서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윽고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었는데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하였다. 이윽고 품계가 통정(通政)으로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우부승지로 바뀌었는데, 겸직은 전례와 같았다. 그 후 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전위(餞慰)하고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체직하여 공조 참의가 되었다.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고 또 체직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당초에 윤원형이, 인종의 재위(在位) 기간이 해를 넘기지 못했다 하여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시키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매우 분개하였었다. 그런데 명종을 그곳에 부묘하게 되자, 사론(士論)이 들고일어나 이때를 틈타 인종까지 아울러 부묘시키려고 하였는데, 공도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신과 뜻이 서로 맞지 않으므로 공이 입시하여 그 잘못된 것을 극력 논변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신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대사헌 김개(金鎧)는 오랫동안 폐해졌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그는 마음속으로 사론을 꺼리어 먼저 기묘사류(己卯士類)를 비난하고 또 조정에도 이런 기습이 있다고 배척하자, 상의 뜻이 꽤 그에게 향하였다. 그러자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입대하기를 청하여, 김개의 음험하고 사특하여 정인(正人)을 해치고자 하는 정상을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앞서 예관(禮官)이, 관원을 보내 사친묘(私親廟)에 치제(致祭)할 것과 사친을 ‘황백부(皇伯父)’로 칭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밖에서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애왕(哀王)을 태뢰(太牢)로 제사지낸 일주D-001과 똑같은 잘못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입시하여 예학(禮學)이 밝지 않아서 즉위 초년의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고 논하고, 또 황백부(皇伯父)의 ‘황(皇)’ 자를 제후국에서 칭하는 것은 부당하니 의당 먼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간행 반포하여 사대부로 하여금 예학을 익혀 알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전후로 경연에 입시하여 글을 대하고 강설(講說)할 때면 정미한 뜻을 깊이 분석하여 이를 시사(時事)에 끌어다 붙여 설명해서 임금을 선으로 인도하고 악을 징계하여 보필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으나 반면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이때에 수많은 인재가 한창 진용되었는데, 그들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급선무로 여겨 건의하여 밝힌 것이 많았기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공은 뜻을 세우고 어진이를 구하여 직임을 맡겨 성사하기를 책임지우는 것으로 대강의 선무(先務)를 삼았으니, 대체로 공의 뜻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법제(法制)보다는 교화(敎化)를 우선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경장파(更張派)의 의논과는 꽤 서로 어긋났고 대신들은 더욱 불평스럽게 여겼다.
이때 퇴계 선생이 이미 남쪽으로 돌아가 공에게 편지를 보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 남헌은 송 나라 장식(張栻)의 호)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공의 처지에 비교하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물러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오래되지 않아 체직되었다. 경오년 봄에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온 경중(京中)의 사대부들이 나와서 전송하였다.
공이 고향에 돌아와서는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書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즐겁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하여 ‘낙암(樂菴)’이라 하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으니, 종유하는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 후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재차 소장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대죄(待罪)하였다. 인하여 성현의 출처에 대한 의리를 말하고 또 대신에게 저촉되어 의리상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신미년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르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임신년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 때문에 공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하고 인하여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공은 사신의 일이 중하다는 것 때문에 마지못하여 조정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에 들어간 즉시 사양하여 체직되었고 사행(使行)도 다른 일 때문에 정지되었다.
그 후 공조 참의와 대사간 등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둔종(臀腫 볼기에 나는 종기)이 아프기 시작하여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유사(儒士) 김점(金坫)은 공의 큰며느리의 친정 아버지였는데, 그가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명이 길고 짧거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염려할 것이 없소. 다만 젊어서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쓰다가 인하여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얻은 것이 있기는 하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날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만일 옛 성현의 얼굴을 직접 뵙고 서로 논의할 수 있다면 나 역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업이 고인에 미치지 못하여 이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나의 명을 연장해 주어 산림에 유유자적하면서 학자들과 더불어 성현의 도를 강구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또한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가사(家事)에 대해 묻자, 답하기를 "척박한 토지나마 몇 경(頃)이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요."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내 집과 다를 것 없소. 내가 그대의 집에서 죽고 싶으니 병이 비록 중하지만 갈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그곳으로 빨리 가기를 명하자, 시자(侍者)가 병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공청(公廳)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관(冠)을 바르게 쓰고 가마에 올라 김공의 집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지내고 졸하였다. 임종시에 아들 효증(孝曾)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는 성질이 경박하니 만일 의사(意思)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에 깊이 쌓아둔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거하니, 11월 초하루였다. 이날 밤 공이 운명하려 할 적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은 46세였다.
상께서는 공이 길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하게 하고 어찰(御札)로 위문까지 하였으나, 모두가 때늦은 뒤였다. 상께서는 공의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부의 이외에 수의(襚衣)까지 더 내려 주었다.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슬퍼하며 공의 옛 우사(寓舍)에 찾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소견이 뛰어나 이황(李滉)과 더불어 편지를 왕복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전현(前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진술한 말들은 모두가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유종(儒宗)으로 추앙했었는데, 불행하게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다 중도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집안 형편이 청빈하여 장사를 치를 수가 없으니, 관(官)에서 상장(喪葬)을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다음해인 계유년 2월에 나주(羅州)의 소재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공이 평소에 스스로 정해 놓았던 곳이다. 원근에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경인년에 이르러, 공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짓는 데 참여했던 것 때문에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품이 뛰어나고 지기(志氣)가 고상하여 나이 겨우 15세쯤 되었을 때에 문득 옛 성현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그래서 경전(經傳)을 널리 종합하여 미묘한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였고, 고금의 역사와 전기(傳記)에도 널리 통하여 무엇이든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이치를 환하게 알고 있었고, 국가의 흥폐와 인물의 득실에 대한 변론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분명하였다. 더욱이 예학에 조예가 깊어 조정으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의 인정(人情)과 예문(禮文), 상례(常禮)와 변례(變禮), 의절(儀節)과 도수(度數)에 대해 연구 검토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구류 백가(九流百家)주D-002 등 이단(異端)의 학문도 또한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중요한 뜻을 탐구하였다. 특히 산법(算法)에 가장 정통하여 비록 그것을 전문으로 한 명가(名家)들도 모두 공을 따를 수가 없었으니, 대체로 그 총명이 뛰어나서 무엇이든 보고 들으면 마치 얼음 녹듯 이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공은 마음씀이 고명하고 몸가짐이 방정하여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과 진퇴(進退)하고 거취(去就)함에 있어 반드시 옳은 방도로 하였다. 그리고 청렴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옳지 못한 데 휩쓸리지 않았으며, 비록 영기(英氣)가 넘쳤지만 처신과 행사를 항상 겸손하게 하여 중도에 맞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또 지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였는데, 항상 아이 적에 어머니를 여의어 미처 복(服)을 입지 못했던 것을 슬프게 여겨, 휘일(諱日)이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한 달씩 소식(素食)을 하며 애모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다. 아버지를 섬길 때는 안색을 잘 살펴 봉양하였는데, 자랄수록 효성이 더욱 독실하였다. 백형(伯兄)인 대림(大臨)이 공보다 한 살 위였는데, 그 형을 마치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집안 일을 반드시 여쭈어서 행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상례와 제례를 일체 고례(古禮)를 따라서 하였고, 집안이나 마을 사이에서 처신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은 정직하고 외모는 온화하였으므로 공을 이간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명종 말기에 위의를 엄정히 갖추고 벼슬길에 나가니, 사대부들이 공을 바라보고는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처럼 여기고 공에게 의지하여 매우 중히 여겼다. 그 후 선조(宣祖)를 만나서는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면서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삼대(三代) 시대와 같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매양 입대할 적마다 마음을 기울여 지적하여 진달하되 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뜻. 또는 최상책의 방법)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시사(時事)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근본이 원대한 계책 만들기를 힘썼기 때문에 세속의 습관에 구애되지도 않았고 허탄하고 고원한 데에 치달리지도 않아서 반드시 준비를 충분히 하여 시행하고 때를 기다려서 행동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시적인 변통(變通)의 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쟁론(爭論)하기를 "이 일은 뒤에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그 큰 강령과 용도가 평소에 본디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선조 초기 퇴계(退溪)가 조정에 있을 적에, 사친을 추봉(追奉)하는 전례와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을 본디 모두 공이 강구하여 제정하였는데, 퇴계가 공의 의견을 많이 따랐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가 "공의전(恭懿殿 인종의 비(妃))은 명종에 대해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고 하자, 퇴계도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왕통을 이어서 군신의 사이였으므로 부자 사이와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조중(朝中)에 글을 보내 이르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공의 변례(變禮)에 통달한 것을 훌륭히 여기고, 퇴계의 신속하게 선(善)을 따르는 태도를 칭찬하였다.
권간(權奸)이 조정을 탁란시킨 이후로 사기(士氣)가 꺾여 떨치지 못하였다. 공은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진이들을 사우(師友)로 삼고 후진들을 가까이 끌어들여 탁류(濁流)를 배격하고 청류(淸流)를 일으키기를 부지런히 하여 마치 물을 가두는 제방과 같이 하였다. 이렇게 한 지 수년 만에 당시 사람들은 공을 소기묘인(小己卯人)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조 초기의 정치에 공이 매우 컸으나, 이윽고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잊은 적이 없었다.
임신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갔는데, 비록 일로 인하여 부름을 받고 가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처음 먹은 뜻을 잊지 않고 다만 조금 시험해 보아 가능 여부의 어떤 조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서 가만히 상하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국사(國事)는 이미 글렀다."고 하였다. 이로부터는 더욱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 바야흐로 재덕(才德)을 감추고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면서 평소 부족했던 것을 더욱 보충하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글을 저술해서 후세에 덕을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이루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공이 작고한 후로 세도(世道)가 문득 어그러져서 동서(東西)의 당론(黨論)이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제공(諸公)이 건의하여 세워놓았던 것들이 다 시행되지 않았으며 사대부 사이에 서로 알력이 생기고 현인과 소인이 한데 뒤섞여 조정이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지나친 의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 당적(黨籍)을 만드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힘써 조제(調劑)하였던 선진(先進)의 명현들도 또한 그 당고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에 공을 추급하여 당적에 넣으려는 자가 있자,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아무 당(黨)으로써 고봉에게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식견 있는 이가 이로 인하여 논하기를 "공이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당론을 조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국가에 관계됨이 이와 같이 중하였다.
공은 자품이 도(道)에 가까워 도체(道體)를 환히 꿰뚫어보았다. 퇴계와 더불어 논한 이기(理氣)의 분별과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 분명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변설이 해박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퇴계가 여러 번 자신의 견해를 굽혀 공을 따르면서 "홀로 밝은 도의 근원을 보았다."고 칭찬하였다. 퇴계가, 주자 이후 제유(諸儒)들이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이비한 견해를 통박한 것들을 절충하다가 의심스럽고 막힌 데가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는데 다른 문인들은 이것을 바랄 수가 없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와 더불어 나정암(羅整菴 정암은 명 나라 학자 나흠순(羅欽順)의 호)이 지은 《곤지기(困知記)》의 잘못된 견해를 논하여 설(說)을 지어 변명함으로써 퇴계의 뜻을 성취시켜 주었는데, 이런 내용은 문집 가운데 자세히 나타나 있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적에 선조가 조신(朝臣) 가운데 누가 학문을 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당시 뭇 현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퇴계는 "감히 알 수 없다."고 사양하고, 오직 이르기를 "기모(奇某)는 문자를 널리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이를 만하나,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행(行)이 지(知)에 미치지 못한다." 하자,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예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로 진퇴하였는데, 어째서 행이 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 퇴계가 영남에서 도를 제창할 때부터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는데, 퇴계와 더불어 서울에서 만난 것은 모두 세 번이고 그 밖에는 오직 편지만 왕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하였으며 공은 호협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기상이 또 서로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퇴계를 복종하여 섬겨 어묵 동정(語黙動靜)을 오직 퇴계만 본받았다. 퇴계의 문하에 종유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지만 허여하고 추천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공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완급(緩急)이 서로 도움이 되고 궁치(宮徵)가 서로 부합하여 거의 천재일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후세 선비들이 이르기를 "공만이 퇴계에게서 재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퇴계도 공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공의 퇴계에 대한 관계는 마치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호)의 정자(程子)에 대한 관계나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의 호)의 주자(朱子)에 대한 관계와 똑같다."고 하니, 이 말이 옳은 것이다.
아, 우리 동방의 도학은 포은(圃隱)으로부터 시작하여 네 현인이 계속해서 나왔으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는[博文約禮] 뜻과 편파한 행동을 막고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한 [距詖息邪] 공은 오히려 크게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퇴계에 이르러서 학문의 표준이 비로소 바르게 되어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꺾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공의 도는 대체로 퇴계와 같았으나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났던 그 시대에는 그것을 펴지 못하였다. 오직 강구하여 밝혀서 우익(羽翼)해 놓은 것만이 서책에 실려 있을 뿐이어서 실로 장재(張載)ㆍ정자와 같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의 흥폐가 어찌 우연한 운수이겠는가. 공이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알았으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자상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는 소장을 올린 적이 없었으니, 그 뜻은 곧 지위를 넘는 무익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공이 작고한 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비로소 공의 주대(奏對)한 말들을 초출하게 해서 《논사록(論思錄)》2권을 만들었는데, 《퇴계문답(退溪問答)》3권, 문집 약간 권과 함께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의 글은 모방하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기력이 크고 법도가 준엄한데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 더욱 장하였으니, 진실로 덕 있는 이의 말이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본관이 함풍(咸豐)이다. 19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공이 가훈을 잘 신칙하므로 부인은 받들기를 오직 조심스럽게 하였다. 부인은 식견과 생각이 남보다 뛰어나고 집안 다스리는 데에도 부지런하였으며 홀로된 지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분명하게 옳은 방도로 가르쳤으니, 그 가훈에서 얻은 것이 많았던 것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효증(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그 다음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는데, 정유왜란(丁酉倭亂) 때 효민ㆍ효맹과 함께 적을 만났으나 굴욕을 당하지 않고 죽었다. 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承旨)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공의 언행에 대해서는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있고 국사(國史)에도 실려 있다. 제유(諸儒)들의 공에 대한 평어(評語)를 다 싣기 어려우므로 이제 그 큰 것들만 적어서 시호(諡號)를 짓는 데 대한 참고에 대비한다.
[주 D-001]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애왕(哀王)을 태뢰(太牢)로 제사지낸 일 : 창읍왕은 한 창읍애왕 부(漢昌邑哀王髆)의 아들로 이름은 하(賀)이다. 한 소제(漢昭帝)가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곽광(霍光) 등 대신에 의해 창읍왕이 제위(帝位)에 올랐으나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즉위한 지 27일 만에 폐해지고 말았는데,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에 자기 생부(生父)인 애왕(哀王)에게 태뢰(太牢)로 제사지냈었다. 《漢書 卷六十八》
[주 D-002] 구류 백가(九流百家) : 구류는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를 말하고, 백가는 유가 이외에 일가(一家)의 설(說)을 세운 수많은 학자를 가리킨다.
2003.06.15
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인데, 세상에서 고봉 선생(高峯先生)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본디 행주인(幸州人)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京畿)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었다. 그의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했는데,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의 융성함이 국사(國史)에 갖추 실려 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이 분이 휘 건(虔)을 낳았는데, 건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치사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조정에서 불러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분의 시호는 정무(貞武)이며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축(軸)인데 승지에 증직되었고, 조(祖) 휘 찬(纘)은 응교(應敎)로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고(考) 휘 진(進)은 호가 물재(勿齋)로 아우 복재(服齋) 준(遵)과 함께 학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시골에 물러가 살았는데 대신(大臣)의 천거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공의 훈전(勳典)에 따라 좌찬성에 추증되고, 공신호(功臣號)가 내리고 군(君)에 봉해졌다. 부인은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영수(永壽)의 딸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인데, 가정(嘉靖) 정해년(중종 22, 1527) 11월 18일에 공을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집에서 낳았다.
공은 겨우 5~6세가 되어서부터 침착하고 묵중하기가 마치 성인(成人)같았다. 7세 때에는 글공부에 힘써 일과(日課)를 정하여 읽되, 새벽이면 일어나 똑바르게 앉아서 저녁 늦도록 글 읽기를 중지하지 않으므로, 동복(僮僕)이 시험삼아 너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 그 뜻을 떠보니, 공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이 맛을 어찌 알겠느냐." 하였다.
8세 때에 모부인(母夫人)이 졸하자, 부르짖어 통곡하며 슬픔이 극진하므로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상을 마치고 나서는, 집안의 번잡한 일들 때문에 공부에 장애가 되는 것을 싫어하여 향숙(鄕塾)으로 나가 배웠는데, 학업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총명하고 기억력도 뛰어나서 같이 배우던 다른 아이들이 배운 것까지 겸하여 통했으며, 시구를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였다. 물재공(勿齋公)이 일찍이 그를 훈계한 글이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위기(爲己)의 학문에만 정신을 집중시켜 오직 날로 부지런히 하였고, 과거 보기 위한 공부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중종과 인종이 서로 이어 승하하자, 공은 포의(布衣)의 동년(童年)으로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소식(素食)을 하였다. 을사년 사림의 변을 들었을 때는 식사를 그만두고 눈물만 흘리다가 인하여 문을 굳게 닫고 수년 동안 밖을 나가지 않았다.
기유년에 처음으로 응시하여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두 방(榜)에 다 합격함으로써 약관의 나이에 벌써 이름이 사림에 드러났다. 문장(文章)이 시장(試場)에서 상대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윤원형(尹元衡)이 그를 꺼린 나머지 공의 시권(試卷)이 높은 등급에 들어갈 줄을 알고 고의로 떨어뜨려버렸다. 그러나 공은 역시 그것을 개의하지 않았다.
을묘년에 물재공이 졸하자, 여묘살이로 3년상을 마치고, 나이 32세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무오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때마침 퇴계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와 있을 때여서 선생에게 나아가 더불어 학문을 논하고 질문하고 힐난하는 가운데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변론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후 퇴계가 보낸 편지에서 "무오년에 내가 서울을 간 것은 매우 낭패스러운 길이었지만, 그러나 오히려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때문이다." 하였다.
맨 처음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어 정자(正字)에 올라 사관(史官)의 천거를 받았으나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았다. 신유년 여름에 비로소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고, 예에 따라 봉교(奉敎)에 승진되었다. 계해년에 승정원 주서에 옮겨졌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 다시 봉교가 되었으나 고과(考課)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이 깎여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윤원형이 국정을 도맡아 하면서 정사를 어지럽히자, 명종 말기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꺾기 위해 이량(李樑)을 진용하여 그를 견제시켰다. 그러나 이량이 다시 인척(姻戚)을 의지하여 권력을 빙자해서 매우 기세를 부렸다. 공은 한때의 명류(名流)인 윤두수(尹斗壽) 형제,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등과 더불어 청의(淸議)를 극력 끌어들였다. 그러자 이량이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공 등을 붕당(朋黨)으로 지목하여 사헌부를 사주해서 논핵하게 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밖으로 축출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차 사림의 화가 일어나게 되어 중외(中外)가 크게 경악하였다. 수일 후에 옥당(玉堂)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 사실을 아뢰자, 명종이 크게 깨닫고, 이량 등을 찬출하고 공을 다시 서용하여 사관(史官)으로 삼았다. 공은 이어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승진되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이로부터 사림이 공을 추중하게 되었고, 명종과 선조 연간에 조정이 다시 바르게 되었다.
갑자년에 사체(辭遞)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고, 병조 좌랑ㆍ성균관 전적ㆍ직강(直講)을 거쳐 이조 정랑에 승진하여 교서관 교리를 겸했다. 그 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예조 정랑ㆍ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병인년 10월에 헌납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에 승진되었고, 정묘년에는 장령(掌令)으로 옮겨졌다가 곧 사예(司藝)로 체직되었으며, 다시 사인과 장령을 역임하였다. 공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여겨 비록 누차 요직을 역임하면서도 항상 한가한 곳을 요구하였다.
정묘년 5월에는 홍문관 응교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 두 조사(詔使)를 맞이하였다. 때마침 명종이 승하하였는데, 조사가 중로에서 부음(訃音)을 받았기 때문에 빈주(賓主)간의 예문(禮文)에 변례(變禮)가 많았다. 게다가 두 조사는 모두 박식하고 예의 바른 유신(儒臣)들로서 서로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이 대부분 상규(常規)에서 벗어난 것들이었는데, 공이 혼자서 그 응접을 담당하여 모두 그 뜻에 맞도록 하였다.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전직되었는데, 경연에 입시하여 맨 먼저 논하기를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는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죽었습니다. 중종 말기에 비로소 그 억울함을 알아, 동시에 죄를 입었던 사람들 가운데 혹은 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 명종)이 어린 나이로 막 즉위했을 때에 소인들이 또 학행이 있는 사림을 무함하여,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기묘인(己卯人)들의 기습(氣習)을 다시 일으킨다고 몰아서 끝내 난역(亂逆)의 율(律)로 논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언적(李彦迪)은 세상에 드문 큰 선비였는데, 역시 죄를 얻어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지금 비록 금망(禁網)이 열렸다 할지라도 시비는 아직도 분명치 않으니, 청컨대 조광조와 이언적을 표창해서 시비를 바르게 하고 인심을 바르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노수신(盧守愼)과 유희춘(柳希春) 등은 모두 학문 높은 유신으로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지금 비록 방환되기는 하였으나, 나이가 이미 50~60세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차서를 따라 진용시킨다면 크게 쓸 수가 없을 것이니, 의당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시켜서 어진이를 등용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윽고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었는데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겸하였다. 이윽고 품계가 통정(通政)으로 승진되어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다시 우부승지로 바뀌었는데, 겸직은 전례와 같았다. 그 후 명을 받고 의주(義州)에 가서 조사(詔使)를 전위(餞慰)하고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체직하여 공조 참의가 되었다. 다시 우승지에 제수되었고 또 체직하여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당초에 윤원형이, 인종의 재위(在位) 기간이 해를 넘기지 못했다 하여 문소전(文昭殿)에 인종을 부묘(祔廟)시키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매우 분개하였었다. 그런데 명종을 그곳에 부묘하게 되자, 사론(士論)이 들고일어나 이때를 틈타 인종까지 아울러 부묘시키려고 하였는데, 공도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신과 뜻이 서로 맞지 않으므로 공이 입시하여 그 잘못된 것을 극력 논변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신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대사헌 김개(金鎧)는 오랫동안 폐해졌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그는 마음속으로 사론을 꺼리어 먼저 기묘사류(己卯士類)를 비난하고 또 조정에도 이런 기습이 있다고 배척하자, 상의 뜻이 꽤 그에게 향하였다. 그러자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입대하기를 청하여, 김개의 음험하고 사특하여 정인(正人)을 해치고자 하는 정상을 아뢰었으나 상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앞서 예관(禮官)이, 관원을 보내 사친묘(私親廟)에 치제(致祭)할 것과 사친을 ‘황백부(皇伯父)’로 칭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공이 밖에서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애왕(哀王)을 태뢰(太牢)로 제사지낸 일주D-001과 똑같은 잘못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입시하여 예학(禮學)이 밝지 않아서 즉위 초년의 과오를 남기게 되었다고 논하고, 또 황백부(皇伯父)의 ‘황(皇)’ 자를 제후국에서 칭하는 것은 부당하니 의당 먼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또 주자(朱子)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간행 반포하여 사대부로 하여금 예학을 익혀 알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전후로 경연에 입시하여 글을 대하고 강설(講說)할 때면 정미한 뜻을 깊이 분석하여 이를 시사(時事)에 끌어다 붙여 설명해서 임금을 선으로 인도하고 악을 징계하여 보필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으나 반면에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이때에 수많은 인재가 한창 진용되었는데, 그들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급선무로 여겨 건의하여 밝힌 것이 많았기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였다. 그러나 공은 뜻을 세우고 어진이를 구하여 직임을 맡겨 성사하기를 책임지우는 것으로 대강의 선무(先務)를 삼았으니, 대체로 공의 뜻은 근본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법제(法制)보다는 교화(敎化)를 우선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경장파(更張派)의 의논과는 꽤 서로 어긋났고 대신들은 더욱 불평스럽게 여겼다.
이때 퇴계 선생이 이미 남쪽으로 돌아가 공에게 편지를 보내 거취(去就)를 논하면서 장남헌(張南軒 남헌은 송 나라 장식(張栻)의 호)이 우윤문(虞允文)과 뜻이 맞지 않아서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하여 공의 처지에 비교하였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물러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오래되지 않아 체직되었다. 경오년 봄에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온 경중(京中)의 사대부들이 나와서 전송하였다.
공이 고향에 돌아와서는 고마산(顧馬山) 남쪽에 서실(書室)을 짓고,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즐겁다.[貧當益可樂]’는 말을 취하여 ‘낙암(樂菴)’이라 하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으니, 종유하는 제자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 후 대사성에 제수되고 또 부경사(赴京使)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재차 소장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양하며 대죄(待罪)하였다. 인하여 성현의 출처에 대한 의리를 말하고 또 대신에게 저촉되어 의리상 나아가 벼슬할 수 없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신미년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르고 또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임신년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 때문에 공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하고 인하여 대사성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공은 사신의 일이 중하다는 것 때문에 마지못하여 조정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에 들어간 즉시 사양하여 체직되었고 사행(使行)도 다른 일 때문에 정지되었다.
그 후 공조 참의와 대사간 등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천안군(天安郡)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둔종(臀腫 볼기에 나는 종기)이 아프기 시작하여 태인현(泰仁縣)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유사(儒士) 김점(金坫)은 공의 큰며느리의 친정 아버지였는데, 그가 고부(古阜)에서 달려와 문병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명이 길고 짧거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염려할 것이 없소. 다만 젊어서부터 문한(文翰)에 힘을 쓰다가 인하여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중년 이후로 비록 얻은 것이 있기는 하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평소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 때문에 날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만일 옛 성현의 얼굴을 직접 뵙고 서로 논의할 수 있다면 나 역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업이 고인에 미치지 못하여 이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나의 명을 연장해 주어 산림에 유유자적하면서 학자들과 더불어 성현의 도를 강구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이 또한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점이 가사(家事)에 대해 묻자, 답하기를 "척박한 토지나마 몇 경(頃)이 있으니, 자손들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요."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내 집과 다를 것 없소. 내가 그대의 집에서 죽고 싶으니 병이 비록 중하지만 갈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그곳으로 빨리 가기를 명하자, 시자(侍者)가 병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중지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공청(公廳)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관(冠)을 바르게 쓰고 가마에 올라 김공의 집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지내고 졸하였다. 임종시에 아들 효증(孝曾)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는 성질이 경박하니 만일 의사(意思)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속에 깊이 쌓아둔다면 내가 걱정이 없겠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거하니, 11월 초하루였다. 이날 밤 공이 운명하려 할 적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은 46세였다.
상께서는 공이 길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하게 하고 어찰(御札)로 위문까지 하였으나, 모두가 때늦은 뒤였다. 상께서는 공의 부음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부의 이외에 수의(襚衣)까지 더 내려 주었다. 서울의 사대부들은 모두 슬퍼하며 공의 옛 우사(寓舍)에 찾아가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젊어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소견이 뛰어나 이황(李滉)과 더불어 편지를 왕복하며 성리학을 강론하여 전현(前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경악(經幄)에 입시하여 진술한 말들은 모두가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도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유종(儒宗)으로 추앙했었는데, 불행하게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다 중도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집안 형편이 청빈하여 장사를 치를 수가 없으니, 관(官)에서 상장(喪葬)을 도와주도록 하여 국가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다음해인 계유년 2월에 나주(羅州)의 소재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은 공이 평소에 스스로 정해 놓았던 곳이다. 원근에서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경인년에 이르러, 공이 일찍이 변무주문(辨誣奏文)을 짓는 데 참여했던 것 때문에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수충익모광국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추증되었다.
공은 천품이 뛰어나고 지기(志氣)가 고상하여 나이 겨우 15세쯤 되었을 때에 문득 옛 성현처럼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그래서 경전(經傳)을 널리 종합하여 미묘한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였고, 고금의 역사와 전기(傳記)에도 널리 통하여 무엇이든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천인 성명(天人性命)의 이치를 환하게 알고 있었고, 국가의 흥폐와 인물의 득실에 대한 변론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분명하였다. 더욱이 예학에 조예가 깊어 조정으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의 인정(人情)과 예문(禮文), 상례(常禮)와 변례(變禮), 의절(儀節)과 도수(度數)에 대해 연구 검토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구류 백가(九流百家)주D-002 등 이단(異端)의 학문도 또한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중요한 뜻을 탐구하였다. 특히 산법(算法)에 가장 정통하여 비록 그것을 전문으로 한 명가(名家)들도 모두 공을 따를 수가 없었으니, 대체로 그 총명이 뛰어나서 무엇이든 보고 들으면 마치 얼음 녹듯 이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공은 마음씀이 고명하고 몸가짐이 방정하여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과 진퇴(進退)하고 거취(去就)함에 있어 반드시 옳은 방도로 하였다. 그리고 청렴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고 온화하면서도 옳지 못한 데 휩쓸리지 않았으며, 비록 영기(英氣)가 넘쳤지만 처신과 행사를 항상 겸손하게 하여 중도에 맞지 않은 일이 거의 없었다. 또 지성으로 효도하고 우애하였는데, 항상 아이 적에 어머니를 여의어 미처 복(服)을 입지 못했던 것을 슬프게 여겨, 휘일(諱日)이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한 달씩 소식(素食)을 하며 애모하는 마음을 변치 않았다. 아버지를 섬길 때는 안색을 잘 살펴 봉양하였는데, 자랄수록 효성이 더욱 독실하였다. 백형(伯兄)인 대림(大臨)이 공보다 한 살 위였는데, 그 형을 마치 아버지 섬기듯이 하여 집안 일을 반드시 여쭈어서 행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상례와 제례를 일체 고례(古禮)를 따라서 하였고, 집안이나 마을 사이에서 처신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은 정직하고 외모는 온화하였으므로 공을 이간하는 말이 전혀 없었다.
명종 말기에 위의를 엄정히 갖추고 벼슬길에 나가니, 사대부들이 공을 바라보고는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나 봉황처럼 여기고 공에게 의지하여 매우 중히 여겼다. 그 후 선조(宣祖)를 만나서는 오랫동안 경악(經幄)에서 모시면서 요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 삼대(三代) 시대와 같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그래서 매양 입대할 적마다 마음을 기울여 지적하여 진달하되 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뜻. 또는 최상책의 방법)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다. 시사(時事)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근본이 원대한 계책 만들기를 힘썼기 때문에 세속의 습관에 구애되지도 않았고 허탄하고 고원한 데에 치달리지도 않아서 반드시 준비를 충분히 하여 시행하고 때를 기다려서 행동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시적인 변통(變通)의 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급급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상의 앞에서 쟁론(爭論)하기를 "이 일은 뒤에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그 큰 강령과 용도가 평소에 본디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선조 초기 퇴계(退溪)가 조정에 있을 적에, 사친을 추봉(追奉)하는 전례와 문소전(文昭殿)에 관한 의논을 본디 모두 공이 강구하여 제정하였는데, 퇴계가 공의 의견을 많이 따랐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가 "공의전(恭懿殿 인종의 비(妃))은 명종에 대해 서로 수숙(嫂叔)의 사이이니, 의당 복(服)이 없어야 한다."고 하자, 퇴계도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왕통을 이어서 군신의 사이였으므로 부자 사이와 같으니 의당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하니, 퇴계가 크게 잘못을 깨닫고 조중(朝中)에 글을 보내 이르기를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공의 변례(變禮)에 통달한 것을 훌륭히 여기고, 퇴계의 신속하게 선(善)을 따르는 태도를 칭찬하였다.
권간(權奸)이 조정을 탁란시킨 이후로 사기(士氣)가 꺾여 떨치지 못하였다. 공은 그 사이에 우뚝 서서 어진이들을 사우(師友)로 삼고 후진들을 가까이 끌어들여 탁류(濁流)를 배격하고 청류(淸流)를 일으키기를 부지런히 하여 마치 물을 가두는 제방과 같이 하였다. 이렇게 한 지 수년 만에 당시 사람들은 공을 소기묘인(小己卯人)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선조 초기의 정치에 공이 매우 컸으나, 이윽고 상신(相臣)과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잊은 적이 없었다.
임신년에 다시 조정에 들어갔는데, 비록 일로 인하여 부름을 받고 가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처음 먹은 뜻을 잊지 않고 다만 조금 시험해 보아 가능 여부의 어떤 조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런데 들어가서 가만히 상하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물러나와 탄식하기를 "국사(國事)는 이미 글렀다."고 하였다. 이로부터는 더욱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 바야흐로 재덕(才德)을 감추고 조용히 심신을 수양하면서 평소 부족했던 것을 더욱 보충하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글을 저술해서 후세에 덕을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이루지 못했으니, 애석하다.
공이 작고한 후로 세도(世道)가 문득 어그러져서 동서(東西)의 당론(黨論)이 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제공(諸公)이 건의하여 세워놓았던 것들이 다 시행되지 않았으며 사대부 사이에 서로 알력이 생기고 현인과 소인이 한데 뒤섞여 조정이 마침내 크게 어지러워졌다.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지나친 의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 당적(黨籍)을 만드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힘써 조제(調劑)하였던 선진(先進)의 명현들도 또한 그 당고를 면치 못하였다. 당시에 공을 추급하여 당적에 넣으려는 자가 있자,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아무 당(黨)으로써 고봉에게 연루시켜서는 안 된다." 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식견 있는 이가 이로 인하여 논하기를 "공이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당론을 조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국가에 관계됨이 이와 같이 중하였다.
공은 자품이 도(道)에 가까워 도체(道體)를 환히 꿰뚫어보았다. 퇴계와 더불어 논한 이기(理氣)의 분별과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뜻에 대해 분명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며 변설이 해박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퇴계가 여러 번 자신의 견해를 굽혀 공을 따르면서 "홀로 밝은 도의 근원을 보았다."고 칭찬하였다. 퇴계가, 주자 이후 제유(諸儒)들이 육구연(陸九淵)과 왕수인(王守仁)의 사이비한 견해를 통박한 것들을 절충하다가 의심스럽고 막힌 데가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는데 다른 문인들은 이것을 바랄 수가 없었다. 공은 또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와 더불어 나정암(羅整菴 정암은 명 나라 학자 나흠순(羅欽順)의 호)이 지은 《곤지기(困知記)》의 잘못된 견해를 논하여 설(說)을 지어 변명함으로써 퇴계의 뜻을 성취시켜 주었는데, 이런 내용은 문집 가운데 자세히 나타나 있다.
퇴계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적에 선조가 조신(朝臣) 가운데 누가 학문을 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당시 뭇 현인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나 퇴계는 "감히 알 수 없다."고 사양하고, 오직 이르기를 "기모(奇某)는 문자를 널리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조예가 깊어 통유(通儒)라 이를 만하나, 다만 수렴(收斂)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가 퇴계에게 묻기를 "기고봉은 행(行)이 지(知)에 미치지 못한다." 하자, 퇴계가 말하기를 "고봉은 예로써 임금을 섬기고 의로 진퇴하였는데, 어째서 행이 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였다. 퇴계가 영남에서 도를 제창할 때부터 공은 멀리 호남에 있었는데, 퇴계와 더불어 서울에서 만난 것은 모두 세 번이고 그 밖에는 오직 편지만 왕복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겸허하고 장중하였으며 공은 호협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므로 기상이 또 서로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퇴계를 복종하여 섬겨 어묵 동정(語黙動靜)을 오직 퇴계만 본받았다. 퇴계의 문하에 종유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지만 허여하고 추천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공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대체로 그 완급(緩急)이 서로 도움이 되고 궁치(宮徵)가 서로 부합하여 거의 천재일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후세 선비들이 이르기를 "공만이 퇴계에게서 재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퇴계도 공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공의 퇴계에 대한 관계는 마치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호)의 정자(程子)에 대한 관계나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의 호)의 주자(朱子)에 대한 관계와 똑같다."고 하니, 이 말이 옳은 것이다.
아, 우리 동방의 도학은 포은(圃隱)으로부터 시작하여 네 현인이 계속해서 나왔으나,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는[博文約禮] 뜻과 편파한 행동을 막고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한 [距詖息邪] 공은 오히려 크게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퇴계에 이르러서 학문의 표준이 비로소 바르게 되어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이 꺾여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공의 도는 대체로 퇴계와 같았으나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났던 그 시대에는 그것을 펴지 못하였다. 오직 강구하여 밝혀서 우익(羽翼)해 놓은 것만이 서책에 실려 있을 뿐이어서 실로 장재(張載)ㆍ정자와 같게 되었으니, 사문(斯文)의 흥폐가 어찌 우연한 운수이겠는가. 공이 대각(臺閣)에 있을 적에는 알았으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자상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물러나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는 소장을 올린 적이 없었으니, 그 뜻은 곧 지위를 넘는 무익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공이 작고한 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비로소 공의 주대(奏對)한 말들을 초출하게 해서 《논사록(論思錄)》2권을 만들었는데, 《퇴계문답(退溪問答)》3권, 문집 약간 권과 함께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의 글은 모방하고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기력이 크고 법도가 준엄한데 비지(碑誌)와 간독(簡牘)에 더욱 장하였으니, 진실로 덕 있는 이의 말이었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이씨는 본관이 함풍(咸豐)이다. 19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공이 가훈을 잘 신칙하므로 부인은 받들기를 오직 조심스럽게 하였다. 부인은 식견과 생각이 남보다 뛰어나고 집안 다스리는 데에도 부지런하였으며 홀로된 지 25년 동안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분명하게 옳은 방도로 가르쳤으니, 그 가훈에서 얻은 것이 많았던 것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효증(孝曾)은 일찍부터 재명(才名)이 있어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벼슬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그 다음은 효민(孝閔)과 효맹(孝孟)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는데, 정유왜란(丁酉倭亂) 때 효민ㆍ효맹과 함께 적을 만났으나 굴욕을 당하지 않고 죽었다. 효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이고 장녀는 승지(承旨)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첨지중추(僉知中樞)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공의 언행에 대해서는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있고 국사(國史)에도 실려 있다. 제유(諸儒)들의 공에 대한 평어(評語)를 다 싣기 어려우므로 이제 그 큰 것들만 적어서 시호(諡號)를 짓는 데 대한 참고에 대비한다.
[주 D-001] 창읍왕(昌邑王)이 즉위하여 애왕(哀王)을 태뢰(太牢)로 제사지낸 일 : 창읍왕은 한 창읍애왕 부(漢昌邑哀王髆)의 아들로 이름은 하(賀)이다. 한 소제(漢昭帝)가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곽광(霍光) 등 대신에 의해 창읍왕이 제위(帝位)에 올랐으나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다가 즉위한 지 27일 만에 폐해지고 말았는데, 그가 제위에 있는 동안에 자기 생부(生父)인 애왕(哀王)에게 태뢰(太牢)로 제사지냈었다. 《漢書 卷六十八》
[주 D-002] 구류 백가(九流百家) : 구류는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를 말하고, 백가는 유가 이외에 일가(一家)의 설(說)을 세운 수많은 학자를 가리킨다.
200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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