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기씨 가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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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아버지 기자오가 영안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공민왕과 영안왕의 원나라 정부내의 지위는 명목상 동일했다. 공민왕 4년 8월에 열린 향연에서의 자리배치를 보면, 공민왕과 황후의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이씨(李氏)는 모두 남면(南面)하고 황후의 弟 趙希?의 처는 동에 앉고 기철과 元나라 사신은 서에 앉고 재추는 계단위에 앉았다. 왕과 이씨는 동등하게 취급되었고, 고려 신하들은 기씨 일족보다 한 등급 낮게 취급되었다. 또 황태자 책봉축하연에서는 "(魯國)공주와 (巒巒)태자는 남면하고 왕은 서쪽에 앉고 이씨는 동쪽에 앉았는데, 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태자에게 주니 태자가 서서 마시고 태자가 술을 부어 외할머니 이씨에게 드리고 다음에 왕과 공주에게 드렸다"고 한다. 공민왕 원년, 왕이 元나라 皇帝의 생일 축하를 위해 정동행성에 행차할 때 기윤은 왕과 말을 나란히 하려 했으나, 공민왕은 경호무사를 전후로 배치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 또 공민왕 5년, 원이 왕에게 12字에 이르는 긴 功臣號를 내렸을 때, 기철은 요양성 평장사로서 왕을 축하했는데, 臣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당시 고려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 기철 제거직후 내린 교서에서 공민왕은 "기철 등이 군주를 전율하는 위세를 빙자"했다고 하며, 7월의 1차 표문에서는 "철등이 황실과 잇달아 혼인하여 大朝(元)의 위엄을 빌어 기염이 충천하매 國主를 협제"했다고 하였으나, 왕은 원을 두려워하여 감히 문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종의 이중권력 상태였던 셈이다. 200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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