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와 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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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홈피에 가보면 우리의 행주기씨유허비를 소개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행주 기씨 비호
행주산성 북쪽 중턱에 위치해 있는 이 비는 행주 기씨의 행적과 업적을 담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고려말 행주 기씨 집안에서 공녀로 뽑혀간 사람 중에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의 감찰기관을 폐지하고 원나라의 힘을 제거한 후에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유허비에 기황후 이야기는 나오지만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는 내용도 없지만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은 더더욱 없다. 누군가 소설을 쓴 것이다.
지금 행주지역에 대대로 기씨가 살지않는데 기씨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산 것인가 생각해본다.
온조왕26년 서기로는 9년에 백제는 마한을 공격한다. 그러나 다른 성은 다 항복했지만 오직 원산과 금현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마한의 이 두성은 1년을 버티다가 온조왕 27년, 서기 10년에 항복하는데 온조왕은 그 유민을 한산의 북으로 옮긴다. 이 한산은 당시 백제의 서울로 오늘날 풍납토성지역인 한강의 남쪽에 있었다. 한산의 북이란 한강의 북쪽이니 지금의 행주지역을 말한다. 온조왕에 의하여 옮겨진 우리 기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기언奇彦 할아버지가 참여하신다. 그 후로는 무관으로 대대로 고위직 장군이 되신다.
1450년 편찬된 세종실록의 지리지에서 고양현에 대하여 번거롭지만 고양에 대하여 알 겸 인용해 본다.
고양현(高陽縣)은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때에 정한 것이다.]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조선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 부원현 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 계사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교하(交河)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6백 79호, 인구가 1천3백1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輻軍)이 65명, 선군(船君)이 20명이다.
고봉현의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고(高)씨요, 망성(亡姓)이 4이니, 진(秦)·강(康)·송(宋)·전(田)씨이다.
행주의 토성이 4이니, 김(金)·기(奇)·은(殷)·전(田)씨이요,
망성(亡姓)이 7이니, 최(崔)·강(康)·부(夫)·즉(則)·고(高)·나(那)·차(車)씨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이(李)씨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이며, 간전(墾田)이 6천3백26결(結)이다. [논이 좀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唐黍]·메밀·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살남초(殺男草)이다.
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성산(城山)[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劒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蜂峴)이 있다.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대자사(大慈寺) [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50결을 주었다.] 압도(鴨島) [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밭[草場]이다.]
여기에서 토성은 대대로 살아온 성씨를 말하고 망성은 옛날에는 살았지만 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더 이상 살지않는 성씨를 말하고 내성은 옛날에는 살지않았는데 지리지 편찬 당시에 이주하여 살고있는 성씨이다. 행주에서 지리지 편찬 당시인 세종시대에 기씨는 토성(土姓)으로 나온다. 그때까지도 일부는 행주에서 대대로 살아오신 분들이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시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 연산 10년(1503) 4월 25일, 의정부 육조에서 광주 고양 등의 고을을 혁파할 것을 청하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 대간· 홍문관을 불러, 광주(廣州)· 고양(高陽) 등 고을을 혁파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김감(金勘)· 이계남(李季男)이 먼저 빈청(賓廳)에 나가 의계(議啓)하기를, “두 고을에는 모두 선왕의 능침(陵寢)이 있으니, 혁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천지간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 죄가 난신(亂臣)과 다름이 없다. 앞서 어지러운 말하는 무리를 모두 중한 법으로 처벌하였는데도 완악하여 징계할 줄 모르고 서로 잇따라 나온다. 이것은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역시 위에 관한 말을 하는데, 지금 정승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내가 마음에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에 배목인(裵目仁)으로 인하여 구례현(求禮縣)을 혁파하였는데, 지금 지언(池彦) 등이 위에 관한 심히 해되는 말을 하였으니,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런 무리를 한결같이 극형으로 처벌하고 그 살던 고을을 혁파하면, 뒷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선왕의 능침이 있지만 어지러운 말을 한 백성이 있음으로 하여 모두 혁파되었다."하여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범하는 자가 드물게 될 것이다. 정승이나 재상들이 어찌 고금 치란(治亂)의 일을 알지 못하여 ‘광주와 고양은 능침이 있는 곳이므로 혁파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의논이 매우 좁고 또 그르다.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자, 유순(洵)이 아뢰기를, “지금 다시 생각하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하였다.
연산 11년(1504) 7월 1일에는 이궁을 지으려고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워, 들어가는 자는 기시에 처하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廣州)· 양주(楊州)· 포천(抱川)· 영평(永平)에서, 서남으로는 파주(坡州)· 고양(高陽)· 양천(陽川)· 금천(衿川)· 과천(果川)· 통진(通鎭)까지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內需司)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를 하니, 초부(樵夫)· 목동(牧童)의 길이 끊겼다
연산 11년(1504) 7월 22일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는 이틀에 한하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게 하다.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이틀에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 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고양(高陽)· 양주(楊洲)· 파주(坡州)· 광주(廣州)· 영평(永平) 등지의 인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세우니, 쑥대밭만 멀리까지 바라보이고, 인가는 볼 수 없었다. 사족(士族)· 서인(庶人)이 비록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더라도 적의 지경에 몰래 들어가듯이 하여,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이를 보면 그나마도 연산군이 고양군을 없애고 주민을 모두 내쫒아 사람의 거주와 왕래를 통제하고 궁안의 음식을 만드는 관청인 내수사의 종들로 하여금 내수사에서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식품재료를 경작하게 하는 외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하고 연산군을 위한 사냥터로 만든 다음에는 모든 주민은 고향 땅을 등져야 했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많지 않던 우리 기씨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제사지내기 위해 이틀동안만 산소를 참배 할 수 있을 정도로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연산군이 쫒겨나고 중종이 고양을 다시 복구 시켰지만 떠난 기씨는 다시 행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 행주에 기씨는 토성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부의 성씨는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일부는 돌아왔다가 절손 되었는지도 모르다. 1982년판 임술보 범례 21쪽에는 1714년판 갑오보를 인용하여 행주산성아래에 기씨의 전답이 있고 여러 종손이 그 땅에 대하여 임대료를 받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니전답을 경작한 기씨는 없지만 18세기까지는 우리 기씨의 땅은 있었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행주부근에 묘소가 있는 분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 세종시대까지 행주산성부근에 살았던 이분들은 기씨의 아주 일부분으로 보인다.
그럼 대부분의 기씨는 어디에서 살았던 것인가?
대부분의 기씨는 개성에서 고위직의 벼슬하며 사신 듯 하다.
족보에는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이전 분들의 묘소 기록이 거의 없고 오직 하나 기황후의 증조부 기홍영 인왕仁王 전하(왕으로 추증 되었으니 공이란 경칭은 격에 맞지 않아 보인다)의 능이 우봉현 남쪽에 있다고만 나온다.
이 우봉이 한석봉의 고향 우봉과 같다면 이곳은 황해도 금천군지역이다. 옛날에 묘를 살던 곳에서 10리 이내에 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개성부근 금천지역에 살았었다는 것이 된다.
그 후에는 기황후의 예를 보면 처음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는 왕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이씨는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하고 어머니의 고향 금마를 위대한 기황후를 낳게한 세상의 이익이 되는 곳이라고 익주로 올려서 오늘날의 익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낳았다.
황후의 고향(정확하게는 아버지의 고향)이 행주였다면 황후의 외가 동내를 이렇게 올려주었으니 행주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할 것인데 행주에 대한 기록들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기황후 때문에 어떤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 이는 기황후의 친가 고향은 개성이고 개성은 더 이상 올려줄 필요 없는 고려의 최고 지역인 수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황후의 집안은 이미 오래전에 행주를 떠나 개성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신돈과 함께 신해참화를 당하신 기현(奇顯) 할아버지를 보아도 신돈이 처음 개성에 와서 공민왕을 도울 때 자기 집을 구해나가기 전까지 기현 할아버지 집(기씨의 99%는 모두 이분 후손이니 쉽게 말해서 640년전 우리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을 보면 기현 할아버지도 행주아닌 개성에 정착해서 사신 것을 알 수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후손은 신해참화 후에 개성부근의 금천군, 재령군, 벽성군, 송화군, 개풍군 지역에 살고 일부는 장단을 지나 파주군 송촌지역에도 산다. 연천이나 양주 회암에 기정승댁 묘소가 있다는 족보의 기록도 참고가 된다.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났지만 행주가 고향이라면 행주로 돌아와 살아야 할 것인데 행주보다는 익숙한 개성부근에 정착한 것이다.
기현 할아버지의 장증손자(長曾孫子)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는 조선을 따라 개성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만리현 청파에 사셨는데 이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자리는 청파 할아버지가 사셨기 대문에 동내이름이 청파동이 된 것이다.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복제 준할아버지가 기묘사화를 당하시자 참판공과 덕성군 두 분 형님이 장성으로 이주하셔서 오늘날 기씨의 대종을 이루는 장성과 광주문중이 되었다,
이로보면 고양시 홈에 소개된 것처럼 기황후의 가족이 화를 당한 병진참화로 기씨가 모두 행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씨는 고려 시대 중기까지는 이미 대부분 고관이 되어 행주를 떠나 개성으로 이주해 사셨고 일부 남은 기씨들도 연산군에 의하여 행주에서 쫒겨나 지금은 행주에 대대로 살고있는 사람이 없다.
2004.05.02
행주 기씨 비호
행주산성 북쪽 중턱에 위치해 있는 이 비는 행주 기씨의 행적과 업적을 담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고려말 행주 기씨 집안에서 공녀로 뽑혀간 사람 중에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의 감찰기관을 폐지하고 원나라의 힘을 제거한 후에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유허비에 기황후 이야기는 나오지만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는 내용도 없지만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은 더더욱 없다. 누군가 소설을 쓴 것이다.
지금 행주지역에 대대로 기씨가 살지않는데 기씨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산 것인가 생각해본다.
온조왕26년 서기로는 9년에 백제는 마한을 공격한다. 그러나 다른 성은 다 항복했지만 오직 원산과 금현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마한의 이 두성은 1년을 버티다가 온조왕 27년, 서기 10년에 항복하는데 온조왕은 그 유민을 한산의 북으로 옮긴다. 이 한산은 당시 백제의 서울로 오늘날 풍납토성지역인 한강의 남쪽에 있었다. 한산의 북이란 한강의 북쪽이니 지금의 행주지역을 말한다. 온조왕에 의하여 옮겨진 우리 기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기언奇彦 할아버지가 참여하신다. 그 후로는 무관으로 대대로 고위직 장군이 되신다.
1450년 편찬된 세종실록의 지리지에서 고양현에 대하여 번거롭지만 고양에 대하여 알 겸 인용해 본다.
고양현(高陽縣)은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때에 정한 것이다.]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조선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 부원현 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 계사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교하(交河)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6백 79호, 인구가 1천3백1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輻軍)이 65명, 선군(船君)이 20명이다.
고봉현의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고(高)씨요, 망성(亡姓)이 4이니, 진(秦)·강(康)·송(宋)·전(田)씨이다.
행주의 토성이 4이니, 김(金)·기(奇)·은(殷)·전(田)씨이요,
망성(亡姓)이 7이니, 최(崔)·강(康)·부(夫)·즉(則)·고(高)·나(那)·차(車)씨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이(李)씨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이며, 간전(墾田)이 6천3백26결(結)이다. [논이 좀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唐黍]·메밀·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살남초(殺男草)이다.
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성산(城山)[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劒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蜂峴)이 있다.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대자사(大慈寺) [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50결을 주었다.] 압도(鴨島) [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밭[草場]이다.]
여기에서 토성은 대대로 살아온 성씨를 말하고 망성은 옛날에는 살았지만 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더 이상 살지않는 성씨를 말하고 내성은 옛날에는 살지않았는데 지리지 편찬 당시에 이주하여 살고있는 성씨이다. 행주에서 지리지 편찬 당시인 세종시대에 기씨는 토성(土姓)으로 나온다. 그때까지도 일부는 행주에서 대대로 살아오신 분들이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시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 연산 10년(1503) 4월 25일, 의정부 육조에서 광주 고양 등의 고을을 혁파할 것을 청하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 대간· 홍문관을 불러, 광주(廣州)· 고양(高陽) 등 고을을 혁파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김감(金勘)· 이계남(李季男)이 먼저 빈청(賓廳)에 나가 의계(議啓)하기를, “두 고을에는 모두 선왕의 능침(陵寢)이 있으니, 혁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천지간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 죄가 난신(亂臣)과 다름이 없다. 앞서 어지러운 말하는 무리를 모두 중한 법으로 처벌하였는데도 완악하여 징계할 줄 모르고 서로 잇따라 나온다. 이것은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역시 위에 관한 말을 하는데, 지금 정승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내가 마음에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에 배목인(裵目仁)으로 인하여 구례현(求禮縣)을 혁파하였는데, 지금 지언(池彦) 등이 위에 관한 심히 해되는 말을 하였으니,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런 무리를 한결같이 극형으로 처벌하고 그 살던 고을을 혁파하면, 뒷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선왕의 능침이 있지만 어지러운 말을 한 백성이 있음으로 하여 모두 혁파되었다."하여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범하는 자가 드물게 될 것이다. 정승이나 재상들이 어찌 고금 치란(治亂)의 일을 알지 못하여 ‘광주와 고양은 능침이 있는 곳이므로 혁파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의논이 매우 좁고 또 그르다.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자, 유순(洵)이 아뢰기를, “지금 다시 생각하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하였다.
연산 11년(1504) 7월 1일에는 이궁을 지으려고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워, 들어가는 자는 기시에 처하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廣州)· 양주(楊州)· 포천(抱川)· 영평(永平)에서, 서남으로는 파주(坡州)· 고양(高陽)· 양천(陽川)· 금천(衿川)· 과천(果川)· 통진(通鎭)까지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內需司)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를 하니, 초부(樵夫)· 목동(牧童)의 길이 끊겼다
연산 11년(1504) 7월 22일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는 이틀에 한하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게 하다.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이틀에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 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고양(高陽)· 양주(楊洲)· 파주(坡州)· 광주(廣州)· 영평(永平) 등지의 인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세우니, 쑥대밭만 멀리까지 바라보이고, 인가는 볼 수 없었다. 사족(士族)· 서인(庶人)이 비록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더라도 적의 지경에 몰래 들어가듯이 하여,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이를 보면 그나마도 연산군이 고양군을 없애고 주민을 모두 내쫒아 사람의 거주와 왕래를 통제하고 궁안의 음식을 만드는 관청인 내수사의 종들로 하여금 내수사에서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식품재료를 경작하게 하는 외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하고 연산군을 위한 사냥터로 만든 다음에는 모든 주민은 고향 땅을 등져야 했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많지 않던 우리 기씨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제사지내기 위해 이틀동안만 산소를 참배 할 수 있을 정도로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연산군이 쫒겨나고 중종이 고양을 다시 복구 시켰지만 떠난 기씨는 다시 행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 행주에 기씨는 토성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부의 성씨는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일부는 돌아왔다가 절손 되었는지도 모르다. 1982년판 임술보 범례 21쪽에는 1714년판 갑오보를 인용하여 행주산성아래에 기씨의 전답이 있고 여러 종손이 그 땅에 대하여 임대료를 받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니전답을 경작한 기씨는 없지만 18세기까지는 우리 기씨의 땅은 있었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행주부근에 묘소가 있는 분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 세종시대까지 행주산성부근에 살았던 이분들은 기씨의 아주 일부분으로 보인다.
그럼 대부분의 기씨는 어디에서 살았던 것인가?
대부분의 기씨는 개성에서 고위직의 벼슬하며 사신 듯 하다.
족보에는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이전 분들의 묘소 기록이 거의 없고 오직 하나 기황후의 증조부 기홍영 인왕仁王 전하(왕으로 추증 되었으니 공이란 경칭은 격에 맞지 않아 보인다)의 능이 우봉현 남쪽에 있다고만 나온다.
이 우봉이 한석봉의 고향 우봉과 같다면 이곳은 황해도 금천군지역이다. 옛날에 묘를 살던 곳에서 10리 이내에 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개성부근 금천지역에 살았었다는 것이 된다.
그 후에는 기황후의 예를 보면 처음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는 왕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이씨는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하고 어머니의 고향 금마를 위대한 기황후를 낳게한 세상의 이익이 되는 곳이라고 익주로 올려서 오늘날의 익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낳았다.
황후의 고향(정확하게는 아버지의 고향)이 행주였다면 황후의 외가 동내를 이렇게 올려주었으니 행주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할 것인데 행주에 대한 기록들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기황후 때문에 어떤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 이는 기황후의 친가 고향은 개성이고 개성은 더 이상 올려줄 필요 없는 고려의 최고 지역인 수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황후의 집안은 이미 오래전에 행주를 떠나 개성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신돈과 함께 신해참화를 당하신 기현(奇顯) 할아버지를 보아도 신돈이 처음 개성에 와서 공민왕을 도울 때 자기 집을 구해나가기 전까지 기현 할아버지 집(기씨의 99%는 모두 이분 후손이니 쉽게 말해서 640년전 우리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을 보면 기현 할아버지도 행주아닌 개성에 정착해서 사신 것을 알 수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후손은 신해참화 후에 개성부근의 금천군, 재령군, 벽성군, 송화군, 개풍군 지역에 살고 일부는 장단을 지나 파주군 송촌지역에도 산다. 연천이나 양주 회암에 기정승댁 묘소가 있다는 족보의 기록도 참고가 된다.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났지만 행주가 고향이라면 행주로 돌아와 살아야 할 것인데 행주보다는 익숙한 개성부근에 정착한 것이다.
기현 할아버지의 장증손자(長曾孫子)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는 조선을 따라 개성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만리현 청파에 사셨는데 이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자리는 청파 할아버지가 사셨기 대문에 동내이름이 청파동이 된 것이다.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복제 준할아버지가 기묘사화를 당하시자 참판공과 덕성군 두 분 형님이 장성으로 이주하셔서 오늘날 기씨의 대종을 이루는 장성과 광주문중이 되었다,
이로보면 고양시 홈에 소개된 것처럼 기황후의 가족이 화를 당한 병진참화로 기씨가 모두 행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씨는 고려 시대 중기까지는 이미 대부분 고관이 되어 행주를 떠나 개성으로 이주해 사셨고 일부 남은 기씨들도 연산군에 의하여 행주에서 쫒겨나 지금은 행주에 대대로 살고있는 사람이 없다.
2004.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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