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은공가장(棄隱奇公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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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家狀)은 비음(碑陰) 묘표(墓表) 갈명(碣銘) 후에 여기에 기록을 한 것임(家狀碑陰墓表碣銘後到錄於此)
둘째 아들 기침(奇琛)쓰다. (정자(正字) 벼슬을 지냄)
아버지의 이름은 의헌(義獻)이고 자(字)는 사직(士直)이시다. 스스로 기은(棄隱)이라 호(號)하였으며 성은 기씨(奇氏)이고 행주인(幸州人)이다.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에 속한다. 휘(諱;이름) 순우(純祐)는 고려(高麗)에 벼슬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고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수전(守全)은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이고 장군으로 나아가 정승이 되면서 공로를 백성에게 베풀었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휘(諱;이름) 면(勉)은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건(虔)은 세종(世宗)조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배수하고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단종(端宗) 말기에 질병이 있다고 거짓으로 휴관(休官)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시호가 정무(貞武)이고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으며 월사(月沙) 이상공정귀(李相公廷龜)께서 신도비(神道碑)를 지었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축(軸)은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이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찬(襸)은 벼슬이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에 이르고 증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인데 즉 아버지의 고조가 되시니라. 증조부 휘(諱;이름) 진(進)은 벼슬이 장사랑(將仕郞)에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고 증직이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하였다. 부인은 증직이 정경부인(貞敬夫人)이고 진산강씨(晉山姜氏)이다. 덕성군(德城君)이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전한(典翰) 준(遵)과 더불어 한가지로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였다. 덕성군(德城君)은 호가 물재(勿齋)이고 전한(典翰)은 복재(服齋)이다. 복재(服齋)선생께서 먼저 과거에 급제하시고 벼슬길에 올라서 현명한 전직으로 조정에 계시다가 불행하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돌아가시자 덕성군(德城君)이 다시는 세상에 뜻이 없음으로 곧 과거를 단념하고 광주(光州)의 소고룡(召古龍)으로 낙남하여 거주함으로 대신(大臣)으로써 참봉(參奉)에 제수(除授)하였다. 그 후에 둘째 아들 대승(大升)의 귀현(貴顯)으로 증직이 덕성군(德城君)에 봉작(封爵)하였다. 기씨(奇氏)가 광주인(光州人)이 된 것은 덕성군(德城君)으로부터 비롯하였으며 할아버지 휘(諱;이름) 대림(大臨)은 벼슬이 종사랑(從仕郞) 동부참봉(東部參奉)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전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이다. 부인은 증직이 숙부인(淑夫人)이고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아버지 휘(諱) 효분(孝芬)은 벼슬이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이다. 부인은 증직이 숙부인(淑夫人)이고 함풍이씨(咸豊李氏)로 아버지가 유회(惟誨)이고 동중추(同中樞)인 종인(宗仁)의 증손이니라. 아버지께서 만력(萬曆) 정해년 정월 초구일(1587년 음력 1월 9일) 미시(7시)에 소고룡리(召古龍里)의 집에서 출생하였는데 일찍 부모를 잃고 작은 아버지인 곡성현감(谷城縣監) 휘 효전(孝荃)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이십오세인 신해년(1611년)에 조씨(趙氏)와 결혼하였다. 조씨(趙氏)는 본관이 광주(廣州)이고 아버지는 지인(之麟)이고 할아버지는 부사용(副司勇) 순선(純善)이니라. 아버지께서 천성의 성품이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하였으며 또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인내하기를 힘쓰는 노력을 하였다. 기쁘고 성낸 것을 경솔하게 사람에게 표시하지 아니함으로 사람이 귀천이나 현우(賢愚) 할 것 없이 다 그 환심을 얻고 그 고향에 이르러서도 다 그렇게함으로 빈객과 벗들이 항상 자리에 가득히 담화를 하면서 웃음을 웃고 종일토록 권태하는 기색이 없었다. 혹 의심하기를 세상으로 더불어 서로 혼합한 것 같으나 밖으로 심히 그 가부(可否)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 실은 사리(事理)가 심히 분명하였다. 처사의 즈음에 강경한 판단이 사람에게 지나침이 있는 것은 봉선(奉先)의 예절에 더욱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때의 풍속이 많이 꺼린 것을 돌아보고 제사를 폐지한자가 있음으로 아버지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한번도 일찍 풍속이 꺼린 것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제사를 폐한 것을 못하게 함으로 고향과 마을에서 다 이에 감화하니라. 작은 아버지와 형을 섬기기를 엄한 부모와 같이하였다. 중년에 효령(孝嶺)으로 이사함으로 고룡(古龍)과의 거리가 삼십리의 먼 곳에 있었으나 매양 삭망(朔望;보름과 그믐)이면 가묘(家廟)를 배례하고 물러나와서 작은 아버지와 형에게 문후(問候)를 드리기를 떳떳이 하면서 혹 빠짐이 없이 하였다. 신미년(1631년)에 형께서 고질이 있음으로 집으로 모셔 다가 치료로 구제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상장(喪葬)을 치르기를 몸소 스스로 조처하면서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유감이 있지 못하게 하였다. 여러 어린 조카들이 다 민혼이 였으나 애무하고 훈육하기를 친자식처럼 하면서 가정을 세워주셨다. 그 막네 조카가 아직 어림으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가르쳐 양육을 하고 그 결혼시킬 때에 이르러서 별거하게 됨으로 전세(田稅)와 잡역(雜役)은 다 일을 처리하면서 간섭함이 없게 하였으나 불행하게 일찍 사망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으로 하면서 아버지께서 세상을 마쳤다. 형의 장자 수백(秀柏)이 소종(小宗)의 제사를 봉사하는데 일찍 고질에 걸림으로 아버지께서 종가(宗家)의 제사의 일이 장차 추락하게 됨으로 힘을 다하여 치료를 하고 그 자식을 훈휵하여 이를 완전하게 성취시켰다. 무릇 이것은 아버지께서 계실 때 간소한 절차가 됨으로 고향과 마을에서 감탄하면서 사모하고 본받은 바가 되니라. 천계(天啓) 정묘년(1627년 정묘호란)에 적신(賊臣) 강홍립(姜弘立)과 한윤(韓潤)이 호병(胡兵)을 인솔하고 의주(義州)에 돌입하여 이어서 평양(平壤)과 황주(黃州)를 함낙하자 조야(朝野)가 흉흉하면서 두러워함으로 인조가 강도(江都)로 행행(行幸)을 하시고 세자(世子)도 전주(全州)로 남하므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격문(檄文)을 발하였다. 아버님이 의병(義兵)을 일으킨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장차 근왕(勤王)의 병사를 기약하였으나 강화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한 심정으로 군병을 파하고 다만 세자(世子)만 호송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돌아왔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년 병자호란) 십이월에 호병(胡兵)이 경성(京城)을 침범함으로 인조가 남한(南漢)의 중궁(中宮)으로 들어가고 세자(世子)와 빈궁(嬪宮)이 강도(江都)에 들어가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포위중에 있었다. 왕이 애통한 조서를 발하므로 아버님이 또 의병(義兵)을 일으킨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군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이를 파하고 돌아오셨는데 일찍 꿈 가운데 시(詩)가 있어 가로대 병자 정축년간의 큰 난리에 성군(聖君)의 어가(御駕)는 어디로 향하였는고? 금일에 이몸이 무용하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백발(百發)의 양궁(良弓)을 손으로 스스로 갖인구나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충성의 용맹과 정의(正義) 기운이 평일에 축적한 증조가 꿈속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니라. 병자년과 정묘년의 사이는 가히 적개(敵愾)의 뜻을 풀어 썼으나 마침내 울분을 머금고 포부한 계책을 펴지 못함이 적지 아니한 것을 대개 볼 수 있으니 당시에 호남(湖南)의 일로(一路)에 인재(人才)의 부고(府庫)가 된 것은 조정에 있어서나 민간에 있어서 그 진퇴를 가히 의뢰한자가 사람이 없지 아니하였는데 사계(沙溪)선생이 남쪽으로 격문(檄文)을 발송하여 도유사(都有司)를 소환하여 위임하고 이를 주관(主管)하게 함으로 일로(一路)의 군무(軍務)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홀로 아버지에게 있게된 것은 대개 그 학문의 순수한 정당함과 기질의 정의(正義)가 일찍 나타나서 일방으로 사림(士林)의 주대하여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여기에서 그 대강을 가히 볼 수 있느니라. 이로부터 이후에는 강개하여 당세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의 밥과 반찬으로 항상 빈한하면서도 처하기를 편안하게 하였다. 육오(六吾)로써 그 집을 이름한 것은 대개 나의 밥을 먹고 나의 샘물을 마시며 나의 옷을 입고 나의 천명을 즐거워하고 나의 운명을 지키면서 나의 연령을 마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또 시(詩)가 있어서 그 뜻을 발휘하고 오히려 또 기은설(棄隱設)을 저술하여 스스로 그 세상을 버린 뜻을 보이는 말은 대개 이른바 군평(君平)[*엄평군(嚴平君)은 한(漢)의 촉인(蜀人)으로 이름은 준(樽)인데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를 생활로 하면서 살어왔는데 충효(忠孝)와 신의로써 사람을 가르치고 하로에 백전을 얻으면 저자에서 돌아와서 화씨의 구슬이라 하더라도 이를 취하지 아니하고 노자의 글을 읽었다고함]이 이미 세상을 버린고로 세상도 또한 군평(君平)을 버린다 라고 한 것은 때의 취세를 보면 권세에 아부하여 첩경으로 명리(名利)를 취득한 것을 더럽힌 것처럼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선비가 청렴하고 결백한 풍속이 없고 다투어서 굽은 길로 과거(科擧)와 벼슬을 취득하여 궁전(宮殿)과 한림원(翰林院)의 몸에 있음으로 아버지께 권고하여 당시의 재상을 보고 그 진취(進取)를 도모하였으나 아버님이 이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대개 당시의 재상(宰相)이 곧 그 안으로 스스로 그 용사(用事)에 굴복하였으나 일찍 한통의 시로 부군(府君)의 평소의 지킨바의 지절(志節)을 묻지 아니한 것은 대개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니고 세속으로부터 이를 보면 어찌 탁월하게 가히 미치지 못한다고 하리오? 집에 감추어둔 계몽서(啓蒙書)는 덕성군(德城君)께서 일찍 완미(玩味)한 바이고 고봉서(高峯書)에 제목하여 공성공(谷城公)에게 전하고 공성공(谷城公)이 부군(府君)에게 전한 것은 난리를 지나도 근심이 없는 것을 보배로 감춘 집에 전해온 뜻을 책뒤에 표시하였으며 양의(兩儀)와 사상(四象)과 분괘(分掛)와 설륵(揲扐)의 뜻이 소명하여 손바닥으로 가르친 것 같은 것이 계몽(啓蒙)의 보조가 됨으로 후에 마땅히 도(道)를 아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니라. 또 시(詩)가 있어 가로대 하나의 이치가 이미 양의(兩儀)에 갖추어졌으나 세속의 선비가 어찌 흩어져서 천개가 된 것을 알리오? 동풍이 푸른 시냇가의 풀에 부는데 흰눈은 분분하게 하늘에서 내리는구나 라고 하였다. 당시의 사람이 전하여 암송하면서 역경(易經)에 학문이 깊다하고 그 첫글귀를 때때로 문인(文人) 학사(學士)의 원고로 일컬으면서 진술 하니라. 일찍 용학전서(庸學全書) 및 설문청독서록(薛文淸讀書錄) 가운데 절실하게 필요한 말을 손수 뽑아서 후손에게 남겨주었다. 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좌우명을 지어서 그 뜻을 발히고 글을 저술하여 아들과 조카를 경계하기를 간절하게 하고 무례(無禮)로 배우지 아니한 것은 이것을 능히 말하면 짐승이라고 말할 수 있음으로 어찌 다만 하나의 가문의 교훈만 될뿐 이리오? 우산안선생(牛山安先生)이 일찍 글을 저술하여 길야은(吉冶隱)의 출처가 단점이된 것이 분명하지 아니함으로 아버님이 또한 글을 저술하여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변별함으로 논자(論者)가 다 아버님의 말로써 공론의 견해로 여긴 것은 대개 미소함을 나타내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 군자의 큰 의리(義理)인 것이니 어찌 야은(冶隱)에게 아부하여 사사가 있어서 그러하리오? 특히 군자가 사람을 논한 것으로써 그 대체(大體)를 관찰할 뿐이므로 조금도 그 하지(瑕疵)를 찾은 것은 아마 충후(忠厚)의 도(道)가 아니니라 무릇 고향이나 이웃마을에 쟁송이 있어서 문득 아버지의 판정을 구하면 아버지께서 곡직(曲直)을 효유하여 한마디로 이를 판정하면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은 대개 이른바 신망이 말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니라. 심의(深衣)을 입되 선왕의 법복(法服)이 되게 하고 곡거(曲裾)의 제도가 선유(先儒)가 많이 상세하지 못함으로 아버님이 뜻으로써 이를 추리하여 대개 그 제도를 얻음으로 사람들이 선왕(先王)의 남긴 법을 잃지 아니하고 진실로 지금에 마땅히 가히 입을만 하다고 하니라. 세간의 일에 뜻을 두지 아니함이 없음으로 일찍 가로대 세상에 일을 사람이 만들지 아니하면 누가 이것을 만들 것인가? 라고 하면서 의약(醫藥) 복서(卜筮)에 이르러서도 또한 넓게 통하고 더욱 산수(算數)에 정통하니라. 무자년(1648년) 사이에 서울의 대종(大宗)에 게시면서 정무공(貞武公)의 부조사판(不祧祀板)을 전천하여 매몰함으로 아버지께서 글을 종손인 진흥(震興) 및 삼종제(8촌동생)인 전정언(前正言) 만헌(晩獻)에게 주시면서 빨리 개조(改造)하라고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정언(正言)은 질병으로 사망하고 진흥(震興)도 죄사(罪死)함으로 마침내 이를 이루지 못하고 (정무공의) 종사(宗祀)도 드디어 끊어짐으로 아버지께서 항상 통탄의 원한을 하였는데 계사년(1653년)에 아버님이 춘추가 육십칠세로 전년 겨울에 고질을 얻고 신음을 계속하여 오시다가 육개월되던 사월 초구일에 돌아가셨다. 수개월전의 꿈에 뱀 두 마리가 와서 물므로 불길한 징조로 여겼는데 과연 사월(巳月) 사일(巳日) 청명(淸明)한 날에 사망을 하시니 꿈의 증험이 반듯이 이와 같으니 아아! 통탄할 일이다. 명년 갑오년(1654년)에 고을에서 남쪽으로 십리떨어진 갑좌(甲坐) 경향(庚向)으로 지한방(池閒坊) 원지동(元地洞)에 장사를 모시니라. 자녀 4명을 두셨는데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이원혁(李元爀)에 출가하였으며 장남은 전(瑑)이고 차남은 불초자 침(琛)인데 신묘년(1651년) 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이고 막네 딸은 일찍 죽었다. 큰 딸 이씨부인(李氏婦人) 및 두 아들은 다 자녀가 있으나 아직 어리니라. 그윽히 생각하건데 아버지께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제약함이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으나 때의 운명이 어긋남으로 능히 세상에 현달하지 못하고 근소하게 선조의 음덕으로 사과(司果)에 제수(除授)하시고 불초자도 혼매하고 노둔하여 공로가 없음으로 능히 정훈(庭訓)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 평일에 있어서도 능히 자식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또 질병으로 오직 아버지에게 근심만 끼치게 함으로 스스로 그 죄책이 하늘에 통함을 알게됨으로 저의 생애에 희망이 없으며 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가르치면서 거의 전가정을 보호한 것도 또한 아버님의 남기신 뜻이 되었다. 노둔한 운명이 구차하게 살아온 것이 금일에 이르는 것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데 아버님의 언행 사실을 정리한 것이 없는데 세월이 조금 오래되고 인사(人事)가 변천하여 혹 이를 알지 못한 자가 있음을 두려워하여 여기에 감히 그 지행(志行)의 만가지 중에 하나라도 차례로 기록하고 다음에 마땅히 당세의 군자에 청하여 그것을 윤택하게 수식함을 얻어서 묘도(墓道)에 표시하여 후인에 고찰할 계획이오니 호읍(號泣)하고 추모(追慕)하고 멸절(滅絶)하면서 아버님의 은혜가 호천망극하옵고 년월일에 불초아들 침(琛)은 읍혈(泣血)하면서 삼가히 글하니라
추기(追記)
이글은 정자공(正字公) 휘 침(琛)이 그 선부군(先父君) 휘(諱) 의헌(義獻) 기은선생(棄隱先生) 가장(家狀)의 일편을 서술한 것이다. 옛날의 여러 차례의 보첩에 기록된 것인데 불행하게 지난 정유보(丁酉譜 1957년판) 가운데 기록이 누락된 것을 수십년이 경과하였다. 이에 계해년(1984년) 보첩에 정유보(丁酉譜)를 증거로하여 드디어 기록이 누락된 것을 받아드리고 보니 망극한 죄책이 송구스러운데 족대부(族大夫) 우대씨(宇大氏)가 갑인보(甲寅譜 1914년판)에서 발견한 것을 드디어 영인(影印)하여 신촌문중후손(新村門中后孫)인 신촌(新村)에 사는 세준(世俊)과 효령(孝嶺)에 사는 세준(世俊) 두분과 풍호(豊鎬)군이 나를 방문하여 하나의 말을 추가하여 기록하게 하니 감히 굳이 상양하지 못하고 이에 응하여 앞날의 족보가 이와 같은 착오가 없지 아니한 것을 생각하고 이를 바르게 하지 아니하면 후손이 선조를 추모하는 도(道)에 또한 무거운 죄책을 면하지 못하게 된고로 여기에 뭇사람의 뜻을 합하여 삼가 이 말을 서술 하니라
광복후 초회 병인(1986년) 봄에 족후손 영명(靈命)은 삼가히 기록하니라
2004.05.27
둘째 아들 기침(奇琛)쓰다. (정자(正字) 벼슬을 지냄)
아버지의 이름은 의헌(義獻)이고 자(字)는 사직(士直)이시다. 스스로 기은(棄隱)이라 호(號)하였으며 성은 기씨(奇氏)이고 행주인(幸州人)이다. 행주(幸州)는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에 속한다. 휘(諱;이름) 순우(純祐)는 고려(高麗)에 벼슬이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고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수전(守全)은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이고 장군으로 나아가 정승이 되면서 공로를 백성에게 베풀었다.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휘(諱;이름) 면(勉)은 벼슬이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건(虔)은 세종(世宗)조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배수하고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단종(端宗) 말기에 질병이 있다고 거짓으로 휴관(休官)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시호가 정무(貞武)이고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으며 월사(月沙) 이상공정귀(李相公廷龜)께서 신도비(神道碑)를 지었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축(軸)은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이다. 아들을 낳으니 휘(諱;이름) 찬(襸)은 벼슬이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에 이르고 증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인데 즉 아버지의 고조가 되시니라. 증조부 휘(諱;이름) 진(進)은 벼슬이 장사랑(將仕郞)에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이고 증직이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이고 덕성군(德城君)에 봉하였다. 부인은 증직이 정경부인(貞敬夫人)이고 진산강씨(晉山姜氏)이다. 덕성군(德城君)이 어머니가 같은 동생인 전한(典翰) 준(遵)과 더불어 한가지로 성리학(性理學)에 종사하였다. 덕성군(德城君)은 호가 물재(勿齋)이고 전한(典翰)은 복재(服齋)이다. 복재(服齋)선생께서 먼저 과거에 급제하시고 벼슬길에 올라서 현명한 전직으로 조정에 계시다가 불행하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돌아가시자 덕성군(德城君)이 다시는 세상에 뜻이 없음으로 곧 과거를 단념하고 광주(光州)의 소고룡(召古龍)으로 낙남하여 거주함으로 대신(大臣)으로써 참봉(參奉)에 제수(除授)하였다. 그 후에 둘째 아들 대승(大升)의 귀현(貴顯)으로 증직이 덕성군(德城君)에 봉작(封爵)하였다. 기씨(奇氏)가 광주인(光州人)이 된 것은 덕성군(德城君)으로부터 비롯하였으며 할아버지 휘(諱;이름) 대림(大臨)은 벼슬이 종사랑(從仕郞) 동부참봉(東部參奉)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전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이다. 부인은 증직이 숙부인(淑夫人)이고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아버지 휘(諱) 효분(孝芬)은 벼슬이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이고 증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이다. 부인은 증직이 숙부인(淑夫人)이고 함풍이씨(咸豊李氏)로 아버지가 유회(惟誨)이고 동중추(同中樞)인 종인(宗仁)의 증손이니라. 아버지께서 만력(萬曆) 정해년 정월 초구일(1587년 음력 1월 9일) 미시(7시)에 소고룡리(召古龍里)의 집에서 출생하였는데 일찍 부모를 잃고 작은 아버지인 곡성현감(谷城縣監) 휘 효전(孝荃)의 집에서 자라났으며 이십오세인 신해년(1611년)에 조씨(趙氏)와 결혼하였다. 조씨(趙氏)는 본관이 광주(廣州)이고 아버지는 지인(之麟)이고 할아버지는 부사용(副司勇) 순선(純善)이니라. 아버지께서 천성의 성품이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하였으며 또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인내하기를 힘쓰는 노력을 하였다. 기쁘고 성낸 것을 경솔하게 사람에게 표시하지 아니함으로 사람이 귀천이나 현우(賢愚) 할 것 없이 다 그 환심을 얻고 그 고향에 이르러서도 다 그렇게함으로 빈객과 벗들이 항상 자리에 가득히 담화를 하면서 웃음을 웃고 종일토록 권태하는 기색이 없었다. 혹 의심하기를 세상으로 더불어 서로 혼합한 것 같으나 밖으로 심히 그 가부(可否)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 실은 사리(事理)가 심히 분명하였다. 처사의 즈음에 강경한 판단이 사람에게 지나침이 있는 것은 봉선(奉先)의 예절에 더욱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때의 풍속이 많이 꺼린 것을 돌아보고 제사를 폐지한자가 있음으로 아버지께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한번도 일찍 풍속이 꺼린 것을 돌아보고 돌아보고 제사를 폐한 것을 못하게 함으로 고향과 마을에서 다 이에 감화하니라. 작은 아버지와 형을 섬기기를 엄한 부모와 같이하였다. 중년에 효령(孝嶺)으로 이사함으로 고룡(古龍)과의 거리가 삼십리의 먼 곳에 있었으나 매양 삭망(朔望;보름과 그믐)이면 가묘(家廟)를 배례하고 물러나와서 작은 아버지와 형에게 문후(問候)를 드리기를 떳떳이 하면서 혹 빠짐이 없이 하였다. 신미년(1631년)에 형께서 고질이 있음으로 집으로 모셔 다가 치료로 구제하기를 지극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구제하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상장(喪葬)을 치르기를 몸소 스스로 조처하면서 그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유감이 있지 못하게 하였다. 여러 어린 조카들이 다 민혼이 였으나 애무하고 훈육하기를 친자식처럼 하면서 가정을 세워주셨다. 그 막네 조카가 아직 어림으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가르쳐 양육을 하고 그 결혼시킬 때에 이르러서 별거하게 됨으로 전세(田稅)와 잡역(雜役)은 다 일을 처리하면서 간섭함이 없게 하였으나 불행하게 일찍 사망함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으로 하면서 아버지께서 세상을 마쳤다. 형의 장자 수백(秀柏)이 소종(小宗)의 제사를 봉사하는데 일찍 고질에 걸림으로 아버지께서 종가(宗家)의 제사의 일이 장차 추락하게 됨으로 힘을 다하여 치료를 하고 그 자식을 훈휵하여 이를 완전하게 성취시켰다. 무릇 이것은 아버지께서 계실 때 간소한 절차가 됨으로 고향과 마을에서 감탄하면서 사모하고 본받은 바가 되니라. 천계(天啓) 정묘년(1627년 정묘호란)에 적신(賊臣) 강홍립(姜弘立)과 한윤(韓潤)이 호병(胡兵)을 인솔하고 의주(義州)에 돌입하여 이어서 평양(平壤)과 황주(黃州)를 함낙하자 조야(朝野)가 흉흉하면서 두러워함으로 인조가 강도(江都)로 행행(行幸)을 하시고 세자(世子)도 전주(全州)로 남하므로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격문(檄文)을 발하였다. 아버님이 의병(義兵)을 일으킨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병량(兵糧)을 모집하여 장차 근왕(勤王)의 병사를 기약하였으나 강화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한 심정으로 군병을 파하고 다만 세자(世子)만 호송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돌아왔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년 병자호란) 십이월에 호병(胡兵)이 경성(京城)을 침범함으로 인조가 남한(南漢)의 중궁(中宮)으로 들어가고 세자(世子)와 빈궁(嬪宮)이 강도(江都)에 들어가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은 포위중에 있었다. 왕이 애통한 조서를 발하므로 아버님이 또 의병(義兵)을 일으킨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군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나 강화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면서 이를 파하고 돌아오셨는데 일찍 꿈 가운데 시(詩)가 있어 가로대 병자 정축년간의 큰 난리에 성군(聖君)의 어가(御駕)는 어디로 향하였는고? 금일에 이몸이 무용하다고 말하지 말 것이니 백발(百發)의 양궁(良弓)을 손으로 스스로 갖인구나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충성의 용맹과 정의(正義) 기운이 평일에 축적한 증조가 꿈속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니라. 병자년과 정묘년의 사이는 가히 적개(敵愾)의 뜻을 풀어 썼으나 마침내 울분을 머금고 포부한 계책을 펴지 못함이 적지 아니한 것을 대개 볼 수 있으니 당시에 호남(湖南)의 일로(一路)에 인재(人才)의 부고(府庫)가 된 것은 조정에 있어서나 민간에 있어서 그 진퇴를 가히 의뢰한자가 사람이 없지 아니하였는데 사계(沙溪)선생이 남쪽으로 격문(檄文)을 발송하여 도유사(都有司)를 소환하여 위임하고 이를 주관(主管)하게 함으로 일로(一路)의 군무(軍務)가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홀로 아버지에게 있게된 것은 대개 그 학문의 순수한 정당함과 기질의 정의(正義)가 일찍 나타나서 일방으로 사림(士林)의 주대하여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여기에서 그 대강을 가히 볼 수 있느니라. 이로부터 이후에는 강개하여 당세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의 밥과 반찬으로 항상 빈한하면서도 처하기를 편안하게 하였다. 육오(六吾)로써 그 집을 이름한 것은 대개 나의 밥을 먹고 나의 샘물을 마시며 나의 옷을 입고 나의 천명을 즐거워하고 나의 운명을 지키면서 나의 연령을 마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또 시(詩)가 있어서 그 뜻을 발휘하고 오히려 또 기은설(棄隱設)을 저술하여 스스로 그 세상을 버린 뜻을 보이는 말은 대개 이른바 군평(君平)[*엄평군(嚴平君)은 한(漢)의 촉인(蜀人)으로 이름은 준(樽)인데 성도(成都)에서 복서(卜筮)를 생활로 하면서 살어왔는데 충효(忠孝)와 신의로써 사람을 가르치고 하로에 백전을 얻으면 저자에서 돌아와서 화씨의 구슬이라 하더라도 이를 취하지 아니하고 노자의 글을 읽었다고함]이 이미 세상을 버린고로 세상도 또한 군평(君平)을 버린다 라고 한 것은 때의 취세를 보면 권세에 아부하여 첩경으로 명리(名利)를 취득한 것을 더럽힌 것처럼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선비가 청렴하고 결백한 풍속이 없고 다투어서 굽은 길로 과거(科擧)와 벼슬을 취득하여 궁전(宮殿)과 한림원(翰林院)의 몸에 있음으로 아버지께 권고하여 당시의 재상을 보고 그 진취(進取)를 도모하였으나 아버님이 이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대개 당시의 재상(宰相)이 곧 그 안으로 스스로 그 용사(用事)에 굴복하였으나 일찍 한통의 시로 부군(府君)의 평소의 지킨바의 지절(志節)을 묻지 아니한 것은 대개 심히 어려운 일이 아니고 세속으로부터 이를 보면 어찌 탁월하게 가히 미치지 못한다고 하리오? 집에 감추어둔 계몽서(啓蒙書)는 덕성군(德城君)께서 일찍 완미(玩味)한 바이고 고봉서(高峯書)에 제목하여 공성공(谷城公)에게 전하고 공성공(谷城公)이 부군(府君)에게 전한 것은 난리를 지나도 근심이 없는 것을 보배로 감춘 집에 전해온 뜻을 책뒤에 표시하였으며 양의(兩儀)와 사상(四象)과 분괘(分掛)와 설륵(揲扐)의 뜻이 소명하여 손바닥으로 가르친 것 같은 것이 계몽(啓蒙)의 보조가 됨으로 후에 마땅히 도(道)를 아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알 것이니라. 또 시(詩)가 있어 가로대 하나의 이치가 이미 양의(兩儀)에 갖추어졌으나 세속의 선비가 어찌 흩어져서 천개가 된 것을 알리오? 동풍이 푸른 시냇가의 풀에 부는데 흰눈은 분분하게 하늘에서 내리는구나 라고 하였다. 당시의 사람이 전하여 암송하면서 역경(易經)에 학문이 깊다하고 그 첫글귀를 때때로 문인(文人) 학사(學士)의 원고로 일컬으면서 진술 하니라. 일찍 용학전서(庸學全書) 및 설문청독서록(薛文淸讀書錄) 가운데 절실하게 필요한 말을 손수 뽑아서 후손에게 남겨주었다. 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좌우명을 지어서 그 뜻을 발히고 글을 저술하여 아들과 조카를 경계하기를 간절하게 하고 무례(無禮)로 배우지 아니한 것은 이것을 능히 말하면 짐승이라고 말할 수 있음으로 어찌 다만 하나의 가문의 교훈만 될뿐 이리오? 우산안선생(牛山安先生)이 일찍 글을 저술하여 길야은(吉冶隱)의 출처가 단점이된 것이 분명하지 아니함으로 아버님이 또한 글을 저술하여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변별함으로 논자(論者)가 다 아버님의 말로써 공론의 견해로 여긴 것은 대개 미소함을 나타내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 군자의 큰 의리(義理)인 것이니 어찌 야은(冶隱)에게 아부하여 사사가 있어서 그러하리오? 특히 군자가 사람을 논한 것으로써 그 대체(大體)를 관찰할 뿐이므로 조금도 그 하지(瑕疵)를 찾은 것은 아마 충후(忠厚)의 도(道)가 아니니라 무릇 고향이나 이웃마을에 쟁송이 있어서 문득 아버지의 판정을 구하면 아버지께서 곡직(曲直)을 효유하여 한마디로 이를 판정하면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은 대개 이른바 신망이 말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니라. 심의(深衣)을 입되 선왕의 법복(法服)이 되게 하고 곡거(曲裾)의 제도가 선유(先儒)가 많이 상세하지 못함으로 아버님이 뜻으로써 이를 추리하여 대개 그 제도를 얻음으로 사람들이 선왕(先王)의 남긴 법을 잃지 아니하고 진실로 지금에 마땅히 가히 입을만 하다고 하니라. 세간의 일에 뜻을 두지 아니함이 없음으로 일찍 가로대 세상에 일을 사람이 만들지 아니하면 누가 이것을 만들 것인가? 라고 하면서 의약(醫藥) 복서(卜筮)에 이르러서도 또한 넓게 통하고 더욱 산수(算數)에 정통하니라. 무자년(1648년) 사이에 서울의 대종(大宗)에 게시면서 정무공(貞武公)의 부조사판(不祧祀板)을 전천하여 매몰함으로 아버지께서 글을 종손인 진흥(震興) 및 삼종제(8촌동생)인 전정언(前正言) 만헌(晩獻)에게 주시면서 빨리 개조(改造)하라고 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정언(正言)은 질병으로 사망하고 진흥(震興)도 죄사(罪死)함으로 마침내 이를 이루지 못하고 (정무공의) 종사(宗祀)도 드디어 끊어짐으로 아버지께서 항상 통탄의 원한을 하였는데 계사년(1653년)에 아버님이 춘추가 육십칠세로 전년 겨울에 고질을 얻고 신음을 계속하여 오시다가 육개월되던 사월 초구일에 돌아가셨다. 수개월전의 꿈에 뱀 두 마리가 와서 물므로 불길한 징조로 여겼는데 과연 사월(巳月) 사일(巳日) 청명(淸明)한 날에 사망을 하시니 꿈의 증험이 반듯이 이와 같으니 아아! 통탄할 일이다. 명년 갑오년(1654년)에 고을에서 남쪽으로 십리떨어진 갑좌(甲坐) 경향(庚向)으로 지한방(池閒坊) 원지동(元地洞)에 장사를 모시니라. 자녀 4명을 두셨는데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이원혁(李元爀)에 출가하였으며 장남은 전(瑑)이고 차남은 불초자 침(琛)인데 신묘년(1651년) 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이고 막네 딸은 일찍 죽었다. 큰 딸 이씨부인(李氏婦人) 및 두 아들은 다 자녀가 있으나 아직 어리니라. 그윽히 생각하건데 아버지께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제약함이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으나 때의 운명이 어긋남으로 능히 세상에 현달하지 못하고 근소하게 선조의 음덕으로 사과(司果)에 제수(除授)하시고 불초자도 혼매하고 노둔하여 공로가 없음으로 능히 정훈(庭訓)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 평일에 있어서도 능히 자식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또 질병으로 오직 아버지에게 근심만 끼치게 함으로 스스로 그 죄책이 하늘에 통함을 알게됨으로 저의 생애에 희망이 없으며 어머니를 봉양하고 자식을 가르치면서 거의 전가정을 보호한 것도 또한 아버님의 남기신 뜻이 되었다. 노둔한 운명이 구차하게 살아온 것이 금일에 이르는 것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데 아버님의 언행 사실을 정리한 것이 없는데 세월이 조금 오래되고 인사(人事)가 변천하여 혹 이를 알지 못한 자가 있음을 두려워하여 여기에 감히 그 지행(志行)의 만가지 중에 하나라도 차례로 기록하고 다음에 마땅히 당세의 군자에 청하여 그것을 윤택하게 수식함을 얻어서 묘도(墓道)에 표시하여 후인에 고찰할 계획이오니 호읍(號泣)하고 추모(追慕)하고 멸절(滅絶)하면서 아버님의 은혜가 호천망극하옵고 년월일에 불초아들 침(琛)은 읍혈(泣血)하면서 삼가히 글하니라
추기(追記)
이글은 정자공(正字公) 휘 침(琛)이 그 선부군(先父君) 휘(諱) 의헌(義獻) 기은선생(棄隱先生) 가장(家狀)의 일편을 서술한 것이다. 옛날의 여러 차례의 보첩에 기록된 것인데 불행하게 지난 정유보(丁酉譜 1957년판) 가운데 기록이 누락된 것을 수십년이 경과하였다. 이에 계해년(1984년) 보첩에 정유보(丁酉譜)를 증거로하여 드디어 기록이 누락된 것을 받아드리고 보니 망극한 죄책이 송구스러운데 족대부(族大夫) 우대씨(宇大氏)가 갑인보(甲寅譜 1914년판)에서 발견한 것을 드디어 영인(影印)하여 신촌문중후손(新村門中后孫)인 신촌(新村)에 사는 세준(世俊)과 효령(孝嶺)에 사는 세준(世俊) 두분과 풍호(豊鎬)군이 나를 방문하여 하나의 말을 추가하여 기록하게 하니 감히 굳이 상양하지 못하고 이에 응하여 앞날의 족보가 이와 같은 착오가 없지 아니한 것을 생각하고 이를 바르게 하지 아니하면 후손이 선조를 추모하는 도(道)에 또한 무거운 죄책을 면하지 못하게 된고로 여기에 뭇사람의 뜻을 합하여 삼가 이 말을 서술 하니라
광복후 초회 병인(1986년) 봄에 족후손 영명(靈命)은 삼가히 기록하니라
200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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