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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선생이 지으신 아버님 덕성군과 어머니 강씨 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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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704회 작성일 21-03-14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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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고(顯考) 장사랑 경기참봉(將仕郞慶基參奉) 기 부군(奇府君)에 대한 묘기(墓記)

선부군(先府君)의 휘는 진(進)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인(幸州人)이다. 증조의 휘는 건(虔)인데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로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이며, 증조비는 정경부인 홍씨(洪氏)이시다. 조고의 휘는 축(軸)인데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로 사헌부 장령에 추증되었으며, 조비는 영인(令人) 정씨(鄭氏)이시다. 선고의 휘는 찬(襸)인데 홍문관 부응교이며, 선비는 숙인(淑人) 김씨이시다. 부군은 성화(成化) 정미년(성종 18, 1487) 12월 정해일에 출생하셨는데, 여섯 살에 부친을 잃었다. 장성하자, 높은 뜻이 있어 아우 준(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하루에 수백 자를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자에 힘을 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옛날과 지금의 일을 꿰뚫었다. 공은 널리 배우고 예(禮)로 몸을 단속하고자 하였고, 오로지 과거급제하여 녹을 먹으려는 계책을 하지 않았다. 아우가 먼저 조정에 올라 이름을 드날렸는데 불행히도 견책을 받아 죽자, 부군은 이미 당세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숙인께서 당(堂)에 계셨으므로 남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원년인 임오년(중종 17, 15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후 5년에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다음해인 무자년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상을 마치자 벼슬을 구하지 않고 마침내 광주(光州)에 거주하였다. 집은 광주의 서북쪽 40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니 지방 이름을 고룡(古龍)이라 하였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 부군은 집에서 있을 때에 쓸쓸하여 일이 없는 듯하였다. 화목(花木)을 심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구경하였으며, 서사(書史)를 열람하여 득실을 상고할 뿐이었다. 말년에 흉년을 만나 아침 저녁의 끼니가 걱정인데도 태연히 자처하였다. 부군은 천자(天資)가 정직 성실하고 소탈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엄하면서도 까다롭지 않고, 검박하며 사치하지 않았다. 책을 볼 때에는 대의를 통달하기에 힘썼으며, 일찍이 장구(章句)를 표절이나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다. 전배(前配)는 남양 방씨(南陽房氏)인데 일찍 별세하였고, 후배(後配)는 유인(孺人) 강씨(姜氏)인데 관향이 진주(晉州)이다. 부친의 휘는 영수(永壽)로 충좌위 사과(忠佐衛司果)이며, 조고의 휘는 학손(鶴孫)으로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며, 증조의 휘는 희맹(希孟)으로 의정부 좌찬성을 지내고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시다. 유인은 단정하고 공손하며 은혜로워 부군에 배필할 만하였다. 5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대림(大臨)이요, 차남은 대승인데 생원이며, 막내는 대절(大節)이다.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부인은 부군보다 22년 전에 별세하였는바, 집 뒤 2리쯤 되는 갑좌 경향(甲坐庚向)의 산에 안장하였다. 부군이 별세하시자, 그 해 3월 경신일에 유인의 무덤 남쪽에 장례하니, 선산인 때문이었다.선비께서 별세하실 때에 여러 아들들은 모두 열 살이 넘지 못하였다. 부군께서는 홀아비로 사시면서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자식들을 부지런히 어루만지고 가르쳐 장성함에 이르렀는데, 모두들 미련하고 어질지 못해서 가정의 교훈을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죄악이 쌓여 마침내 부군에게 화가 미쳐 별세하였으니, 슬피 울부짖음에 애통한 마음이 뼛속에 사무친다. 이에 감히 묘기를 이와 같이 짓는 것이다. 묘표에 글을 적는 일은 앞으로 기다려 할 것이다. 슬픈 마음 하늘처럼 다함이 없으니, 아, 애통하다.

顯考將仕郞慶基參奉奇府君墓記
先府君諱。字子順。姓奇氏。幸州人。曾祖諱虔。判中樞府院使。諡貞武公。妣貞敬夫人洪氏。祖諱軸。行豊儲倉副使。贈司憲府掌令。妣令人鄭氏。考諱禶。弘文館副應敎。妣淑人金氏。府君生於成化丁未十二月丁亥。生六歲而孤。旣長有高志。與母弟遵學。日記數十日言。遂肆力文字間。馳騁經史。穿而今古。思欲博以約之。不專爲覓擧干祿計。弟先登朝。明直揚庭。不幸被譴而歿。府君已無復當世意。然以淑人在堂。尙隨人擧選。嘉靖元年壬午。中司馬試。後五年。以宰相薦。除慶基殿參奉。授將仕郞。明年戊子。□內艱。服闋。不求仕。遂居光州。家在州治西北四十里。鄕曰古龍。洞曰金井。府君家居。蕭然若無事。植花木。以觀榮悴。閱書史。以攷得失而已。晩値年荒。憂在朝夕。而處之自裕。以乙卯正月辛亥。卒于正寢。年六十有九。府君天資直諒夷廣。不立畦畛。嚴而不苛。儉而不泰。觀書務通大義。未嘗尋章摘句所著詩文數百篇。前配南陽房氏。早卒。後配孺人姜氏。系晉州。父諱永壽。忠佐衛司果。祖諱鶴孫。掌隸院司評。曾祖諱希孟。議政府左贊成。晉山君。諡文良公。孺人端淑恭惠。克配府君。生五男一女。長曰大臨。次曰大升。生員。季曰大節。餘皆夭。孺人先府君二十二年卒。
窆舍後二里許甲坐庚向之原。府君歿之歲三月庚申。葬于孺人塋南。因山也。先妣之卒也諸孤皆未逾十歲。府君鱞居守窮。撫敎辛勤以至長大。而諸孤皆昏愚。無所肖似。不能奉承庭訓。顯揚萬分。而罪稔惡積。遽速戾于府君。攀慕號殞。痛貫心骨。敢竊記壙中如此。若夫表隧之事。則蓋有待也。昊天罔極。嗚呼庸哉。

선비(先妣)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이장한 묘기

아, 슬프다. 우리 선비께서 동원(東原)에 안장한 지 22년 만에 선부군께서 우리들을 버리고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장차 그해 3월 경신일에 장례하여 쌍분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땅을 파자 물이 나와 마침내 유인의 묘 위 5~6보 되는 곳에 옮겨 묘터를 잡고 장례를 마쳤다. 아들들은 선비를 모신 곳이 좋은 땅을 얻지 못함을 서글퍼하여 애통함이 뼛속에 사무쳤으므로 즉시 옮겨 모시기로 상의하였으나, 빈궁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금년 3월 경신일에 부군의 묘 옆에 옮겨 모셨다. 성계(姓系)와 행실은 부군의 묘기에 대략 서술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선비는 홍치(弘治) 신유년(연산군 7, 1501)에 태어나서 향년 34세에 별세하였으며, 5남 1녀를 낳았는데, 생존한 자는 세 사람이다. 거듭 생각건대, 선비께서는 부도(婦道)를 닦아 부군에게 배필이 되었는데, 부군은 은둔하여 덕을 쌓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후손들에게 법을 남겼으나 여러 아들들은 어질지 못하여 만분의 일도 현양하지 못하니, 사무쳐 울부짖음에 하늘도 다함이 없다. 이에 저으기 그 일을 이와 같이 기록하는 것이다. 훌륭한 작자(作者)에게 묘문을 청하여 덕행의 대략을 자세히 드러내어 묘에 표하는 것으로 말하면 장차 기다림이 있을 것이요, 감히 뒤늦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 애통하다. 아들 대승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기록한다.

先妣孺人姜氏遷墓記
嗚呼。惟我先妣。葬于東原之二十二年。先府君棄諸孤。將以是歲三月庚申。葬爲雙塋之規。發地遇水。遂移穴於上五六步。乃克襄事。竊傷先妣衣襚之藏。不得善地。痛貫心骨。卽議遷奉。而窮不能辦。乃於今年三月庚申。遷附府君塋左姓系行實。粗敍于府君墓記。故不復錄。先妣生於弘治辛酉。享年三十四而卒。生五男一女。存者三人。重惟先妣克修婦道以對府君。而府君隱德不曜。貽則後昆而諸孤等無所肖似。不能顯揚萬一。號慕殞絶。昊天罔極。敢竊記其事如此。若夫請文作者。備著德行之大槪而表諸隧。則將有待也。非敢後也。嗚呼痛哉。男大升泣血謹記。200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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