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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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광산구 임곡동 소개(행주기가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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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644회 작성일 02-01-0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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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마을

조선조말기에 광산김씨 김기풍공이 마을앞산이 여덟 선비가 북을 치고 노는 좋은 형국이라 하여처음 터를 잡았으며 그뒤 행주기씨가 신룡리 신촌에서 옮겨와 오늘에 이른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25명으로 그중 남자 12명, 여자 13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8호, 기타 2호등으로 모두10호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임곡동사무소의 동북단에 위치한다.

신촌마을

원래는 召古龍이라 하였으나 조선조초기 1520년경 행주기씨 덕성군 기진공이 들어오면서부터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조선조초기 장수황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뒤 덕성군 기진공이 기묘사화를 피해 경기도 고양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에 이른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175명으로 그중 남자 85명, 여자 90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52호, 기타 6호등으로 총 65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채소과수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임곡동사무소의 동북단에 자리하고 있다.

자생조직
敬老孝親 시범마을이며, 상부상조의 위친계, 행주기씨문계, 부녀회가 있다

문화유적
신라말 또는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五層石塔(도지정문화재 8호)이 있으며 마을뒤 낙암산에 고봉기대승선생의 독학적인 낙암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촌중으로 옮겨졌다.



용동마을
낡은 터」「金井洞」이라 불리어오다가 일침기에 용동이라 개칭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6세기초에 행주기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뒤 장흥고씨, 전주이씨가 들어와 오늘에 이른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40명으로 그중 남자 19명, 여자 21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5호, 장흥고씨 3호, 기타 1호등으로 모두 11호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담배, 채소 및 청과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동사무소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마을앞에 斗亭堤라는 넓은 저수지가 있다.

문화유적
덕성군 기진선생의 유적비가 있으며,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오남제」라는 제각이있다.



샘동마을
원래는「샘골」이었으나 일침기에 한자로 고쳐 泉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이말은은 1480년경 신라시조 朴赫居世의 46대손인 朴漢昆公이 당시 함평현감으로 재직중 박산이 명기임을 알고 장자 朴培根公을 그곳에 살게 하고 次子 상공과 손자인 황을 이곳 샘골에 살게 했다고 전해오며 뒤이어 진주정씨 정만업공이 함평 월야에서 옮겨와 지금에 이른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101명으로 남자 51명, 여자 50명이며 성씨분포는 죽산박씨 9호, 전주강씨 8호, 행주기씨 7호, 광산이씨 5호, 기타 10호 등으로 모두 39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다.

위치 및 자연환경
동사무소 관내 북부중앙에 위치하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정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생조직
상부계가 조직되어 있어 마을공동재산으로 답 3反 , 차일등이 있다.

문화유적
마을앞에 청주한씨의 효열비가 있다.



두동마을
처음에는 「두말」이라 불리었으나 조선조초기에 두동으로 개칭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이마을은 1580년경 여흥민씨 민청도공이 가운이 기울자 이주할 곳을 찾다가 이곳의 지세를 보고 오래 안주할 곳이라 하여 이주개촌하였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97명으로 남자 46명, 여자 51명이며 성씨분포는 여흥민씨 7호, 김해김씨 10호, 행주기씨 7호, 기타 13호등으로 총 37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잎담배, 청과류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동사무소 동부에 위치하는 산지와 평야가 혼합된 전형적인 전원마을이다.

자생조직
위친계, 친목계, 마을부녀회등이 조직되어 있다.

문화유적
마을앞에 수령 400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1655년에 세워진 여흥민씨의 제각인 「東山齊」가 있다.

전 설
마을모습이 舟形局으로 생겨서 샘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하여 마을안에는 우물을 파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디름골에 샘하나를 파서 식수로 사용했다한다.



비시동마을
마을뒷산의 형상이 마치 활끝처럼 생겼다하여 「비시말」이라 부르다가 漢字인 飛翅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지금부터 2백여년전 행주기씨 기동조공이 개촌정착하여 지금에 이른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112명으로 남자 55명, 여자 57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8호, 기타 22호등으로 모두 31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농업이 주업이다.

위치 및 자연환경
동사무소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마을전경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생조직
주민 상부상조를 위한 상부계가 조직되어 있다.



가정마을
마을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지금부터 450년전 智禮錢氏 錢兵使公이 개촌하였으나 곧 나주와 화순등지로 떠났으며 그뒤 玄風郭氏 곽희인공이 임곡면 원산막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으며 1780년에 나주임씨 임채호공이 나주에서 옮겨오고 뒤이어 宋, 奇, 金 三姓이 들어와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95명으로 그중 남자 56명, 여자 39명이며 성씨분포는 여산송씨 8호, 행주기씨 5호, 광산김씨 4호, 나주임씨 3호, 기타 12호등으로 모두 40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나 산지를 이용, 韓牛를 길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임곡동사무소내 북부에 위치하여 장성군 남면과 접계하고 있는 산촌마을이다.

자생조직
위친계와 마을 부녀회등이 조직되어 있다.

문화유적
마을뒷산 양림골에 신라때의 古利 養林寺址가 있으며 신라 경문왕때의 고승 제해당의 사리를 간직하는 부서가 있다.




신임곡마을
급격한 인구의 팽창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의해 원임곡에서 분리, 신임곡으로 개칭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900년경 광산김씨 김경화공이 장성군 동화면에서 옮겨와 마을이 생성되었으며 1914년 면사무소 소재지가 된후 면사무소, 지서등 기관이 원임곡에서 옮겨와 이지역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246명으로 그중 남자 119명, 여자 127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9호, 광산김씨 9호, 죽산박씨 5호, 나주나씨, 전주이씨 등 모두 83호가 거주하고 있는 散姓村이다.

산업경제
마을대부분이 시가지형태로 되어있어 관공서와 관내 전주민을 상대로 하는 상공업종이 집중되어 있다.

위치 및 자연환경
높은 산악을 등에 지고 황룡강연변에 위치하여 산수경관이 수려하며 마을앞에 비옥한 들이 펼쳐져 있는 살기좋은 마을이다.

자생조직
임곡번영회와 위친계가 조직되어 있다.



원임곡마을
일면 任實이라고도 하며 원래의 임곡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580년경 成平현감 朴承陽公의 후손인 박인공이 博山에서 옮겨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88명으로 그중 남자 33명, 여자 55명이며 성씨분포는 죽산박씨 16호, 행주기씨 2호, 기타 18호 등으로 모두 40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다.

위치 및 자연환경
뒤로는 백우산이 자리잡고 황룡강이 마을앞을 흐르는 아름다운 농촌이다.

자생조직
사부계, 예조계가 조직되어 있다.

성내마을
일명 「성안」이라고도 하며 마을주위에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7세기초 함평군 나산면에서 晋州鄭氏 鄭文斗公이 이곳의 산수가 좋아 이주정착하였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318명으로 그중 남자 157명, 여자 153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14호, 장흥고씨 7호, 성평이씨 5호, 기타 63호등으로 모두 89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12호가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위치 및 자연환경
백우산의 높은 봉우리가 솟아있고 눈앞에 황룡강물이 바라다 보이는 경치좋은 마을이다.

자생조직
마을 全戶가 참여한 위친계가 있으며 상조계가 조직되어 주민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문화유적
마을앞에 육모정이 있으며 행주기씨 愼齊公派의 제각이 있다.



광곡마을
백우산의 넓은 산골이 있다하여 옛이름을 「너부실」이라 하였고 그후 漢字名인 광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400년대에 평산신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사기그릇을 구워 생활하다가 고봉 기대승선생이 光國功臣勳으로 백우산 주변의 임야 및 전답을 賜牌地로 받음으로써 평산 신씨는 떠나고 기대승선생이 신룡리에서 수학을 위하여 이곳에 옮겨와 살았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150명으로 그중 남자 76명, 여자 74명이며 성씨별로는 행주기씨 34호, 전주이씨, 파평윤씨, 밀양박씨 명명 3호, 기타 8호등으로 모두 56가구가 살고 있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축산과 딸기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황룡강상류 호남선 철도변에 위치한 산수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자생조직
위선과 친목을 위한 백우회가 조직되어 있다.

문화유적
고봉 기대승선생을 모시는 빙월당이 있고 그 長子인 奇孝曾公이 부친의 3년상을 치르기위해 기거했던 곳을 후손들이 개축한 칠송정이 있으며 그옆에 奇世勳선생의 휴양소였던애일당이 있고 마을앞산에 행주기씨 中派齊室인 歸厚齊가 있다.



연계마을
옛날에는 큰비가 오면 황룡강물이 범람해 마을전체가 섬이 된다하여 조선조말 장성군수 김생규공이 江島라 일렀으나 제방을 쌓은후 水害安全地帶가 되면서 연계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1909년 죽산박씨 朴眞福公이 황룡강연변의 초원을 개간, 입주 정착하였으며 그뒤 죽산박씨 몇戶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137명으로 남자 79명, 여자 58명이며 성씨분포는 경주김씨 6호, 탐진최씨, 행주기씨등 총 46가구가 살고있는 산성촌이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시설원예로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황룡강상류에 위치한 주위경관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자생조직
위친계, 혼인계, 마을부녀회등이 조직되어 있다.



종산마을
속칭 「종메」또는 「독골」이라고 하며 그 두뜸을 합쳐서 종산이라 부르는데 이는 宗孫이 사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연유한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평산신씨 長節公의 21세손인 권주당이 한양에서 낙향하여 정착하였으나 그7대손인 신성공때 전북 고창으로 모두 떠났으며 그후 행주기씨 기효증공이 아래마을 廣谷에서 옮겨오면서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92명으로 남자 44명, 여자 48명이며 성씨분포는 행주기씨 7호, 전주이씨, 청안이씨 각 4호, 기타 17戶등으로 모두 32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딸기등을 생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황룡강이 마을앞을 흐르고 호남선 철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자생조직
위친계와 마을 부녀회가 조직되어 있다.

문화유적
마을뒷산 石燈골에 행주기씨 기언정공의 제실인 두남제가 있고 평산신씨 권수당 제향하는永思齊가 마을안에 있다.



와산마을
마을뒷산의 형국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산이라 하며 속칭 草技라고도 부른다.

마을의 형성과 변천
이마을은 1821년 나주나씨 羅 文公이 나주에서, 밀양박씨 朴在元公이 밀양에서 이주해오고 그후 許씨, 함평이씨순으로 입주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구 및 성씨분포
인구는 총 41명으로 그중 남자 18명, 여자 23명이며 성씨분포는 밀양박씨 4호, 행주기씨 2호, 기타 9호 등으로 모두 15가구가 거주한다.

산업경제
주업은 경종농업이며 딸기등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린다.

위치 및 자연환경
임곡동사무소관내 최북단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생조직
위친계, 친목계가 조직되어 있다.


200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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