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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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승봉랑(承奉郞) 총부 산랑(摠部散郞) 사(賜) 비어대(緋魚袋) 증(贈)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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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3,145회 작성일 23-03-2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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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승봉랑(承奉郞) 총부 산랑(摠部散郞) 사(賜) 비어대(緋魚袋) 증(贈)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 판전리사사 상호군(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 기공(奇公)의 행장

증조(曾祖)는 휘 윤숙(允肅)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判吏部事)를 지냈고,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조(祖)는 휘 홍영(洪穎)으로,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保勝郞將)을 지냈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에 증직되었다.
고(考)는 휘 관(琯)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 상장군(三司右使上將軍)을 지냈다.

공의 휘는 자오(子敖)요, 자도 자오(子敖)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처음에 문공(門功)으로 산원(散員)에 임명되었다. 지원(至元) 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킨 원(元)나라 대왕(大王) 내안(乃顔)의 일당인 합단(哈丹)이 그 무리와 함께 동쪽을 향해 진번(眞番) 쪽으로 도주하여 우리나라 강역으로 난입하였는데, 그 반역의 기세가 매우 성한 가운데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충렬왕(忠烈王)이 황제의 딸인 안평공주(安平公主)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가 그 예봉을 피하였고, 주군(州郡)도 모두 험한 요새지에 의거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지키느라 중외가 흉흉하였다.
공이 이때에 중군 편장(中軍偏將)의 신분으로 깃발을 등에 지고 선두에서 치달리는 등 자못 공을 세웠다. 적이 평정되고 나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총부 산랑(摠部散郞)이 되었고, 외방에 나가서 선주(宣州)를 다스리기도 하였는데, 거하는 곳마다 그 직책에 걸맞게 하였으므로 떠난 뒤에는 사람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공은 원래 대대로 빛나는 의관(衣冠) 가문의 출신인데도 벼슬길에서 그다지 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품이 관후한 데다 높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청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날마다 어진 사대부들과 어울려 노닐면서 환락을 다하기에 힘썼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63세의 나이로 천력(天曆) 무진년(1328, 충숙왕 15)에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부인 삼한국태부인(三韓國太夫人) 이씨(李氏)는 좌복야(左僕射) 휘 주(湊)의 손녀요, 국학 좨주(國學祭酒) 휘 행검(行儉)의 따님이다. 대족 출신으로 성대한 덕을 갖추고 군자의 짝이 되어 5남 3녀를 낳았는데, 지금의 황후는 그 막내이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기씨(奇氏)는 국가의 초창기부터 무재(武材)로 일컬음을 받으면서 대대로 공로를 드러냈다. 그 뒤에 인왕(仁王 인종 )의 왕비 임씨(任氏)가 의왕(毅王 의종 )ㆍ명왕(明王 명종 )ㆍ신왕(神王 신종 )의 세 왕을 낳고 공예왕태후(恭睿王太后)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공의 조모는 바로 왕태후의 아우인 평장(平章) 휘 유(濡)의 손녀요, 판사(判事) 휘 경순(景恂)의 따님이다. 이로부터 임씨와 기씨 두 성씨가 더욱 커지고 귀해지면서 동국(東國)의 으뜸이 되었다.
공의 증조인 시중(侍中) 강정공(康靖公)은 총재(冢宰)로서 의왕ㆍ명왕ㆍ신왕을 보필하였다. 의왕 말년을 당하여 무인 정중부(鄭仲夫)가 난을 일으켜 조정의 신하들을 죽이고 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로부터 권신이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나오자 진신(搢紳)들이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했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침착하게 도를 견지하며 시종 부지(扶持)해서 선왕의 옛 기업을 잃지 않게 한 것은 시중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공의 조부인 복야(僕射) 역시 비분강개하며 절의를 몸에 지녔다. 국가의 운세가 힘들고 어려운 때를 당하여 진양공(晉陽公) 최이(崔怡)가 나랏일을 제멋대로 처리하였는데, 공이 비록 권신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긴 하였으나 아첨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매번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의 도리를 가지고 깨우쳐서 간특한 짓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최이가 병들어 눕게 됨에, 그 아들 항(沆)이 못나고 어리석은데도 사람들이 대부분 항에게 빌붙었으나 복야만은 그를 미워하였다. 최이가 언젠가 후계자를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에, 복야가 곧장 현인(賢人)을 천거하면서 그를 후계자로 하라고 답변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 항이 후계자가 되고 나서 예전의 유감을 풀려고 공을 배척하였다. 이에 공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니, 당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공의 부친인 삼사(三司)는 본래 휘가 장(璋)이었으나, 뒤에 국휘(國諱 임금의 이름 )를 피하여 개명하였다. 처음에 장군의 신분으로 외방에 나가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었는데, 오로지 관대하고 온화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포편(蒲鞭)과 해수(薤水)의 정사를 펼쳤으므로 백성들이 차마 기만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의 성적이 우수해서 부름을 받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응양군(鷹揚軍)으로 영전하였다.
국가의 제도에 의하면, 군정(軍政)과 관련된 상벌과 장교의 진퇴에 대한 일은 일체 응양(鷹揚)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사는 그 은혜와 위엄을 내리는 권한을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고 예법에 입각해서 행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감복하였다. 이로부터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상부(相府)에 오르게 되었는데, 충렬왕(忠烈王)이 거실(巨室)이요 국로(國老)라고 하여 더욱 예모를 가하였으며, 애영(哀榮)의 은혜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공의 모친인 연흥군부인(延興郡夫人) 박씨(朴氏)는 전법 판서(典法判書) 휘 휘(暉)의 따님이요, 시중(侍中) 문진공(文眞公) 이장용(李藏用)의 외손이다. 지원(至元) 원년(1264, 원종 5)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올해에는 왕공(王公)과 군목(群牧) 모두 상도(上都)에서 모일 것이니, 왕은 역마를 타고 입조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문진공이 평장(平章)의 신분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입근(入覲)해서 비상한 총애를 받았는데, 이로부터 문진공의 덕업과 문장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 우승상(右丞相)이었던 동평 충헌왕(東平忠憲王)이 문진공을 매우 큰 그릇으로 여겨 특별한 예로 대우하면서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자리를 비워 두곤 하였으며, 한림(翰林) 왕 학사(王學士) 등 제공도 그 풍도를 흠모하여 모두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명을 선양하는 동시에 본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해를 제거하여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덕을 입게 하였다.
공은 이처럼 내외가 모두 명문 출신이다. 고조(高祖)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휘 수전(守全) 이하로부터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백성에게 은공을 베풀었는데, 공이 그 음덕(陰德)을 향유하지 못하고서 낮은 지위로 생을 마쳤으니, 이는 어쩌면 하늘이 그 보답을 크게 하여 후손에게 베풀어 주려고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남 식(軾)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 철(轍)은 첨의 정승(僉議政丞)으로 지금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고, 다음 원(轅)은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로 지금 덕양군(德陽君)에 봉해졌고, 다음 주(輈)는 대광(大匡)으로 원윤(元尹)이고, 다음 윤(輪)은 우상시(右常侍)이다. 장녀는 상의 평리(商議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전의령(典儀令) 염돈소(廉敦紹)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모두 11인이다. 장손 천린(天麟)은 소자(小字)가 완택보화(完澤普化)인데 판도 총랑(版圖摠郞)으로 연곡(輦轂 연경 )에 입시하여 지금 직성 사인(直省舍人)으로 있고, 다음 인걸(仁傑)은 소자가 첩목이보화(帖睦邇溥化)인데 군부 총랑(軍簿摠郞)으로 궐정(闕庭)에서 숙위하고 있고, 다음 천기(天驥)와 유걸(有傑)과 전룡(田龍)은 모두 낭장(郞將)이고, 나머지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손녀는 7인이다. 장손녀는 홍복도감 판관(弘福都監判官) 홍보환(洪寶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가문에서 대대로 쌓은 공덕은 국가의 사책에 기재되어 있고, 공의 빛나는 사업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들어 있다. 지금 그중에 대체적인 내용만을 간추려 행장을 지어서 채택할 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지정(至正) 모년 8월 1일에 삼가 짓다.

[주-D001] 포편(蒲鞭) :
    때려도 아프지 않도록 부들 가지로 만든 회초리를 말한다. 후한(後漢) 유관(劉寬)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관리와 백성들이 혹 과실을 범하더라도 형벌 대신 포편으로 다스려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감화시킨 고사가 있다. 지방 장관이 관후하게 백성을 사랑하며 심복시킬 때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後漢書 卷25 劉寬列傳》

[주-D002] 해수(薤水) :
    지방 장관이 청렴하게 지내면서 호족(豪族)을 진압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말한다. 후한 방삼(龐參)이 한양 태수(漢陽太守)로 부임하여 고사(高士)인 임당(任棠)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아무 말 없이 염교의 큰 뿌리 하나〔薤一大本〕와 물 한 사발〔水一盂〕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엎드려 있자, 방삼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물처럼 청렴하고, 염교 뿌리를 뽑아 버리듯 힘 있는 자를 억누르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을 돌보아 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51 龐參列傳》

[주-D003] 애영(哀榮)의 은혜 :
    임금이 신하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영광스럽게 되도록 해 주었다는 말인데, 《논어》 자장(子張)의 “살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죽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긴다.〔其生也榮 其死也哀〕”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4] 상도(上都) :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해당하는 난하(灤河) 북안(北岸)의 개평부(開平府)에 위치하였는데, 난경(灤京) 혹은 난도(灤都)라고도 하였다. 대도(大都)인 연경(燕京)과 함께 양도(兩都)로 칭해졌으며, 1년에 한 번씩 천자가 순행하게 되어 있었다.

[인용 가정집]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A&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014A_0130_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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